■ 시(한시) 아래 쓰여 있는
각각의 글들은 한시에 대한
전문적인 분석이나 해석,
그리고 해설이 아닌
개인의 소소한 감상입니다.
읽는 사람에 따라 그 내용 및 감상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雪中訪友人不友(설중방우인불우)
- 눈 내리는 날 친구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다
雪色白於紙
설색백어지
擧鞭書姓字
거편서성자
莫敎風掃地
막교풍소지
好待主人至
호대주인지
눈빛이 종이보다 희기에
채찍을 들어 내 성과 이름을 써 둔다
바람이여 불어서 땅을 쓸지 말고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주려무나
- 이규보(李奎報), 「雪中訪友人不友」, 전문
이규보(1168~1241)는 「동명왕 편(東明王篇)」을 지은 것으로 유명한 고려의 문신이자 시인이다.
그의 삶에 대한 평가는 현재 다양하지만,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점은 바로 그의 문학적 재능일 것이다.
본 블로그에서 다루었던 득흑묘아(검은 고양이를 얻다)와 같은 재기 발랄하고 유머러스한 시들도 그가 남긴 것이며, 위의 「설중방우인불우」와 같이 지금으로 말하자면 아름다운 서정시도 그가 쓴 것이니, 그의 문학적 · 예술적인 가치에 대해서 만큼은 큰 이견이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눈 내리는 풍경만큼 사람의 시선과 마음을 빼앗는 것이 또 있을까.
일순간에 주변은 조용해지고,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쌓인 길을 향해 내가 처음으로 발을 내디디고 싶은 유혹을 견디기가 어려워진다.
이런 날 이것저것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특별한 기별도 없이 찾아갈 수 있는 벗이 있다면 그것 또한 인생의 복일터(물론 요즘에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하지만 이 시의 화자조차 벗을 만나지 못한 채, 그저 내가 왔다가 갔노라 하는 흔적 하나 눈 위에 남기고, 다시 발길을 돌려야 하는 처지이다.
눈밭을 종이 삼아 내 이름을 써서 남긴다고는 하나, 언제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날려버릴지, 또 언제 눈이 더 내려서 그것을 덮을지 알 수가 없지만, 그 행위 자체는 낭만적이지 않은가.
만에 하나라도 운이 좋아서, 눈 위에 쓴 글자를 주인이 보기라도 한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山中雪夜(산중설야)
- 눈 오는 밤 산중에서
紙被生寒佛燈暗
지피생한불등암
沙彌一夜不鳴鐘
사미일야불명종
應嗔宿客開門早
응진숙객개문조
要看庵前雪壓松
요간암전설압송
종이(얇은) 이불에는 한기가 돌고 불등은 어두운데
사미승은 한밤 내내 종을 치지 않는구나
틀림없이 자던 손님 일찍 나간 것 꾸짖겠지만
암자 앞 눈이 쌓인 소나무 보려 했을 뿐이로다
- 이제현(李齊賢), 「山中雪夜」, 전문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고려말의 시인이자 문신, 그리고 성리학자이자 화가이다.
그는 성리학을 고려에 소개하고 보급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은 인물이며, 그로 인해 고려는 성리학을 널리 수용하게 되었다.
『익재집(益齋集)』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고, 위의 시 「 山中雪夜(산중설야) 」는 익재집 권 3에 실려있다.
시 속에서 화자는 아마도 어떤 암자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깊고 긴 겨울밤, 종이로 만든 이불(또는 '종이처럼 얇은 이불'로도 해석이 가능하다)에는 냉기가 돌고, 그 때문에라도 잠은 오지 않는다. 혹은 옅은 잠에서 자꾸만 깬다.
산속에서 밤을 지내본 사람은 안다. 산속의 밤이 얼마나 빨리 찾아오는지, 그리고 그 냉기가 얼마나 오래가는지.
설령 방에 불을 넣었다고 할지라도 시원치 않을 정도로 산중의 밤의 위력은 대단하다.
사미, 또는 사미승(沙彌僧)은 수행 중에 있는 어린 남자 승려를 말하는데, 서툴러서인지, 게을러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불당에 제대로 불을 밝히는 것도, 방에 군불을 지피는 것도, 그리고 종을 치는 것에도 큰 관심이 없다.
뼛속까지 한기는 돌고, 잠은 오지 않는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미승이 짜증을 낸다고 할지라도, 최대한 옷을 두껍게 입고 밖으로 나와서, 겨울 경치나 구경할 뿐이다.
夜之半(야지반)
- 깊은 밤
截取冬之夜半强
절취동지야반강
春風被裏屈幡藏
춘풍피리굴번장
有燈無月郞來夕
유등무월랑래석
曲曲鋪舒寸寸長
곡곡포서촌촌장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달 없는 밤 님 오실제 등불 아래에서
굽이굽이 펴리라
- 황진이(黃眞伊), 「夜之半」, 전문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서예가, 음악가인 황진이(생몰년 미상)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드라마와 영화 등으로 많이 만들어져 있어, 그의 이름은 우리에게 친숙하다).
당시 기녀라는 신분상 실록 등 정사(正史)에는 등장하지 않으나, 여러 야사(野史, 허균의 성소부부고(1613년), 이덕무의 청비록(18세 중후반) 등)등을 통해 해박한 성리학적 지식과 문학적 재능이 탁월하여, 당대의 양반 및 명사, 그리고 왕족과도 교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족인 벽계수(세종의 17번째 아들 영해군의 손자, 본명 이종숙)와 당대 최고의 소리꾼 이사종 등과의 사랑 이야기가 특히 유명하다)
개성 출신인 그는 서경덕 ·박연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이른바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동짓달 기나긴 밤 허리를 베어내어, 봄바람 같은 이불 아래 넣었다가 님이 오시는 날 굽이굽이 펴다니, 이만한 사랑의 절창도 또 없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유혹적이고, 또 어떻게 보면 단순한 남녀 간의 사랑을 초월한, 더 높은 관계를 묘사한 것도 같다.
이렇게 중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것도, 그의 재능이 탁월하다는 것의 반증이리라.
그가 이 시어를 만든 순간, 사랑의 시간들은 시 속에 멈추고, 다시 만나는 그날, 그 시간들은 그 앞에서 다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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