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붉고 붉은 머리칼, 남자와 뱀파이어
힘없이 고개를 숙인 남성의 목(뒷목)에 입술을 가져가는 젊은 여성.
남성은 여성의 품에 안겨,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조용히 흐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여성에게 몸을 내맡기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은 남성의 머리와 어깨를 덮은 채 마치 넘쳐흐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길게 늘어져 있다.
붉고 붉은 그녀의 망토는 남자의 등과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는다.
게다가 두 인물의 표정은 극도로 생략되어 있어서, 이들의 감정 상태를 읽을 수 없지만 적어도 행복하거나, 기쁨에 넘쳐 있거나, 신이 나있는 등의 종류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손도 남자의 어깨 위로 올라가 있는 것으로 보아, 둘은 서로를 안고 있는 것일 텐데 여성은 어쩐 일인지 검은 아우라 같은 것에 둘러싸여 있으며, 그것은 전체적으로 탁하고 거친 터치의 그림 속에서 더욱 어둠을 길게 드리우고 있다.
그들은 지금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는 것일까.
2. 그림의 제목이 바뀌다
위의 그림은 「절규 The Scream, The Cry, 1893」로 너무나 유명한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뱀파이어(Vampire, Vampyr)」라는 작품이다.
'뱀파이어'라는 제목을 인지한 채 이 그림을 보면, 어딘지 으스스한 느낌과 함께 상상력을 조금 덧붙이자면, 뭉크가 실제로 저런 장면을 목격한 후 그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도 든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학창 시절 저 그림을 보고 친구들과 이것은 진짜로 (빈사상태의) 남자의 목을 물어뜯는 흡혈귀를 그린 것이다, 아니다, 흡혈귀가 아니라 슬퍼하는 남자를 상대 여자가 목덜미 키스로 위로하고 축복하는 그림이다 등등,
이런저런 해석을 내렸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여성이 남성의 목덜미에 키스를 한다'는 자체에는 큰 이견이 없었던 것 같다.
「사랑과 고통(Love and Pain)」, 이것이 1893년 뭉크가 위의 그림에 붙였던 원래의 제목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지금까지도 이것을 '흡혈귀'라고 알고 있을까.
여기에는 사연이(?) 하나 있다.
뭉크의 친구이자 폴란드의 극작가. 소설가. 시인(퇴폐적 자연주의 학파). 비평가였던 스타니스와프 프르지비체프스키(Stanistaw Przybyszewski, 1868~1927)가 이 그림을 본 후 '흡혈귀'라고 불렀고, 뭉크는 그것도 나름 좋았는지 제목을 변경하였다.
프르지비체프스키의 느낌적인 느낌이 그러했듯, 우리의 시선과 초점도 거기에 맞춰보면 남성은 여성은 품에 전적으로 몸을 내맡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소설이나 영화 등을 보면 이들은 사람의 정신을 조종해서 꼼짝못하게 만든 다음, 그들의 목을 물어 피를 빤다. 그리고 배불리(?) 식사를 마친 그들은 인간을 죽이거나 자신과 같은 종족으로 만든다.
입을 한껏 벌린 채 목을 공략하는 뱀파이어의 무시무시한 힘 앞에서, 인간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당신은 이제부터 영원히 늙지 않아,
어쩌면 시간과 공을 들여 이 여성 뱀파이어가 남성에게 '영생'을 미끼로 던졌을지도 모른다.
그런 시선으로 이 그림을 보면, 남성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만사를 체념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3. 사랑과 고통
위의 그림은 1893년 뭉크가 그린 「흡혈귀」의 원래 버전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뭉크는 하나의 그림을 여러 버전으로 그린 다작으로도 유명한데, 앞의 그림(1895년)과 비교해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 좌측이 「흡혈귀」로 잘 알려진 1895년 작품이고, 우측이 1893년에 그린 최초의 작품이다.
분명 같은 인물을 그린 것인데, 느낌이 다르다. 우선 우측의 작품과 좌측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의 머리카락 색이 다르고, 인물들을 묘사하는 방식도 다르다.
우측의 작품에서 남자의 얼굴은 좌측의 작품에 비해 훨씬 더 뭉개져 있는 것처럼 보이고, 뭉크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의 눈 부분에 번진 것 같은 자국으로 인해 이 남자가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그에 비해 좌측의 남자의 얼굴은 지나치게 창백한 느낌이다).
그리고 좌측의 여성에 비해 우측의 여성이 좀 더 남성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있는 것 같은 모양이고(좌측의 여성의 눈부분은 어딘지 모르게 차갑고 냉혹하게 느껴진다), 두 사람의 둘러싸고 있는 배경의 느낌도 많이 다르다.
마치 뭉개져 있는 듯한 남자의 얼굴에서 가늠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남자를 꼭 안아주며 자신의 얼굴을 남자의 뒷목 또는 뒤통수 가까이에 대고 있는 여자.
사랑의 다른 이름은 고통이라는 것을 깨달은 두 사람.
그들의 포옹은 눈물로 얼룩지고, 어쩌면 이것은 헤어지기 직전(아마도 기약 없는 헤어짐)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 절절한 아픔과 격정이 보는 사람의 마음마저도 뒤흔드는 것 같다.
3. 다양한 변주
일찍이 프르지비체프스키가 이 그림에 '흡혈귀'라는 제목을 붙임으로써, 뭉크는 같은 모티브의 그림에도 조금씩 변화를 준다.
1893년, 1895년을 거쳐 이 그림은 ⌜숲속의 뱀파이어 1916~1918⌟ 라는 또 다른 제목의 수채화로 등장한다.
두 사람이 서로를 안고 있는 본래의 모티브는 그대로 가지고 오되, 그 배경이 상대적으로 밝은 색채를 띤 숲속으로 바뀐 것이다.
예술이라는 것은 그것을 보고 읽고 즐기는 대중의 시선으로 인해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가는 경우가 있다.
뭉크의 경우만 보아도 한 가지 그림에 여러 다른 버전이 존재하는데, 어쩌면 그가 자신의 작품을 향유하는 대중의 생각을 의식하거나 수용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마치 뭉크의 대표작 「절규」를 보고 이것이 '그림 속 해골 같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비명이다'라고 오랫동안 여겨져 왔던 것처럼(사실 사실 이 그림 속 인물은 '자연을 관통하는 커다란 비명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막고 있는 것'이다) 말이다.
✔예술에는 정답이 없다. 그리고 해석은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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