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이다. 설사 그의 이름은 가물가물할지라도, 아래의 그림을 보면 누구나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림 속의 남성은 여성의 볼에 입맞춤을 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여성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막 포개려고 하는 그런 상황인지도 모른다.
남성의 황금빛 망토의 문양은 대체로 사각형인 반면, 여성의 원피스는 대체로 원이다.
표정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두 사람은 정말 환상적인 한때를 보내고 있으며, 두 사람의 발아래 펼쳐진 꽃밭은 노랑과 보랏빛의 찬란함 투성이다.
남성의 키스로부터 시작된 꽃잎들이 여성의 머리칼로 옮겨가며 활짝 피어오른다.
그리고 여성의 발목에서 시작된 것인지, 아니면 꽃밭에서 나온 덩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여성의 무릎과 발목에는 온통 노란 하트가 그려져 있다.
개인적으로는 가을이 되면 언제나 클림트의 이 그림을 떠올린다. 이 황금빛의 찬란함 속에, 따뜻함과 황홀함이 뒤섞여 있는 것 같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두 사람의 한때(물론 이 그림은 보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감상을 이끌어낼 수 있다).
1. 구스타프 클림트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처럼, 클림트도 사후 50년 쯤 지난 시점에서 서서히 주목을 받기 시작하다가,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아티스트가 되었다.
💬 구스타프 클림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자세한 것을 알기 힘들다. 클림트가 자서전을 쓴 적도 없고 인터뷰한 적도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짐작할 수 있는 기본적인 사항이 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는 1862년 7월 14일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보헤미아 출신의 귀금속 세공사이자 조각가였다.
그가 나중에 금을 이용하여 모자이크 작업을 펼칠 때 아버지의 수공예품에 대한 기억이 크게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클림트는 또 오페라 가수인 어머니에게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물려받았다.
천재 베토벤을 기념하는 위대한 작품을 만든 것도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음악에 대한 열정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 오스트리아 화가 (인물세계사, 차창룡)
작품의 유명세에 비해 그의 생애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지만, 그가 부모로부터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았다는 것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876년 그는 빈 응용 미술 학교에 입학하여 모자이크, 금속 이용 방법, 도자기 미술, 부조 등의 다양한 기법을 익혔고, 이때의 경험은 향후 그의 작품 속에 다양한 방법으로 녹아들게 된다.
이 시기의 클림트는 한스 마카르트(Hans Makart)로 대표되는 역사화(학술 역사화)에 매료되어 있었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및 그 밖의 지역에서 시각 예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다작 화가인 마카르트의 여러 작품들 또한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당시 왕실에서는 각 지역에 새로운 건축물을 만들거나 수리를 할 때 실내에 그림을 그려넣고는 했는데, 이때 클림트도 의뢰를 받아 남동생인 에른스트, 그리고 친구인 프란츠 마치와 함께 트란실바니아의 펠레스키 왕궁, 헤름스빌라의 침실 등 빈의 저택들을 '한스 마카르트 스타일'로 장식했다.
그 중 백미는 1888년 완성된 <구 부르크 극장의 관객석>이었다.
💬1886년 클림트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착수하게 되는데, 그것은 부르크 극장을 장식하는 작업이었다. 1888년에 완성된 <구 부르크 극장의 관객석>은 등장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세밀한 초상을 섬세하게 그려 넣어 보는 이들을 경탄케 했다.
이 작업으로 인해 황제에게 특별격려상인 황금공로십자훈장을 받았고, 그들의 명성은 빈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 오스트리아 화가 (인물세계사, 차창룡)
2. 빈 분리파를 결성하다
그러던 1892년 동생인 에른스트가 죽자, 클림트는 큰 실의와 절망에 빠져서, 몇 년 간 붓을 들지 못했다.
장엄한 스케일과 섬세한 터치가 공존하는 역사화에 매료되었던 그의 작품 세계도 서서히 변모하기 시작하는데, 1895년 다시 작품 활동을 재개했을 때 이미 그는 상징주의(symbolisme)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상징주의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예술 전반에 걸쳐서 일어난 운동으로, 서양 미술사에서 말하는 상징주의는 19세기 후반 이른바 인상주의의 '실증적 표현에 대한 대립 및 저항'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1895년 당시 클림트는 교육부로부터 빈 대학의 대강당에 그림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아 구상 중이었다.
친구 마치는 중앙과 신학 부분을, 그는 철학, 의학, 법학 부분을 맡아 그림을 완성하였는데, 후에 이 작품이 왼성되자 빈의 미술계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노골적인 신체 표현, 강렬한 에로티시즘의 표현은 보수적인 빈의 미술계를 뒤흔들어 놓았고, 안 그래도 폐쇄적이고 아카데미적인 그들의 태도에 반감을 느끼고 있었던 그는 1896년 요제프 엥겔버트, 카를 몰과 함께 분리파의 기원이 되는 연합회를 처음으로 기획했으며, 이듬해에는 '빈 분리파(Wiener Secession)'를 공식적으로 창설했다.
💬 1898년에는 베를린 분리파, 뮌헨 분리파 소속 예술가들과 함께 분리파 전시회를 개최했다. 특히 빈 분리파 소속 건축가였던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Joseph Maria Olbrich)는 빈에 빈 분리파 전시관을 건설했는데 전시관 입구에는 "시대에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이라는 표어를 내걸었다.
빈 분리파는 종합 예술을 지향했기 때문에 공예품 전시회도 열었다.
* 출처 : [위키백과], 빈 분리파
공간, 조각, 회화, 음악이 한데 어우러지는 총체적 예술(혹은 종합 예술)을 지향했던 분리파의 특징을 잘 드러내주는 것이 1902년 제14회 분리파 전시회이다.
이는 악성 베토벤을 기리기 위한 공간이었는데, 내부 디자인은 건축가 요제프 호프만이, 조각가 막스 클링거가 중앙의 홀에 베토벤 조각상을, 작곡가. 지휘자인 구스타프 말러가 베토벤 9번 교향곡을 편곡한 작품을 직접 지휘하였으며, 그리고 전시장 입구 왼쪽 방에는 클림트의 벽화 《베토벤 프리즈》가 그려졌다.
《베토벤 프리즈》는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모티브로 그려졌는데, 두 남녀가 뜨겁게 포옹하고 키스하는 장면으로 끝이 나는 이 작품은 클림트가 평생에 걸쳐서 꿈꾸고 도전했던 상징주의와 응용미술의 절정을 잘 보여준 예라고 할 수 있다.
3. 자유인으로서의 클림트
응용미술과 순수미술의 이상적인 결합으로 일컬어졌던 빈 분리파는 1905년에 클림트가 탈퇴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와해된다. 이제 그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신만의 예술 세계에 몰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많은 여성들과 사랑을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다시 맨 앞의 그림 《키스》에 대해 언급하자면 그림 속 여성이 누구인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 그의 정신적 동반자로 일컬어지는 에밀리 플뢰게(Emilie Louise Flöge, 오스트리아의 패션 디자이너. 사업가) 라는 설이 있지만 정확하지 않다 - .
그녀는 1908년 1월 클림트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한달음에 달려와, 같은 해 2월 6일 클림트가 세상을 떠날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빈이 낳은 유명한 예술가
클림트가 만약
자신의 작품이 현재
얼마나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지
볼 수 있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는 지금 오스트리아 예술의
간판스타로 이름을 올렸고,
그 당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었던
작업 방식은
일상 문화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 오스트리아 화가 (인물세계사, 차창룡)
클림트의 전기를 쓴 니나 크랜젤의 말처럼, 현재 그의 작품들은 그래픽 디자인화 되어 넥타이, 수건, 티셔츠, 가방, 심지어 타로 카드나 퍼즐에도 흔하게 등장한다.
클림트의 재조명과 함께 그의 제자이자 동료인 에곤 실레와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도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 자유분방함과 이상이 함께 공존하는 클림트의 세계는 시간이 흘러서도 여전한 매력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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