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아래 쓰여있는 각각의 글들은
시에 대한 전문적인 분석이나 해석,
그리고 해설이 아닌
개인의 소소한 감상일 뿐입니다.
오해나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무더위
멍하니 그저
푸른 숲 나뭇가지에 시선 던지고
앞을 향해 발길 내어딛는다
머리가
텅
비어서인가
가슴이
꽉
막혀서인가
- 오보영, 《무더위》, 전문
덥다,라는 말도 내뱉기 힘들 정도로 몸도 마음도 축축 늘어지는 요즘이다.
또 한 번의 불면의 밤을 선사한 태풍은 지나갔지만 이제 다시 뙤약볕은 아직 나 살아있어, 하며 곧 고개를 들이밀 것이다.
여름철 공기가 너무도 뜨거우면 순간적으로 머리가 띵하고 어지럽고, 다리에 힘이 풀린다.
땡볕을 걷고 싶어서 걷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이동의 동선 중에 걸릴 때가 종종 있지 않은가.
그런데 하필 지척에 그늘은 없고, 손선풍기도 부채도 넥밴드도 없는 그런 난처한 상황.
어딘가 앉고 싶고 눕고 싶고, 가능하다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잠깐의 낮잠도 자고 싶다.
온갖 신체의 기능은 떨어지고, 오던 길을 다시 돌아서 다시 탈것으로 돌아가고 싶다.
추위도 더위도, 그렇게 쉽게 나가떨어지지 않는다.
시원한 숲길을 걷는 상상도, 조금은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11월 즈음을 떠올리는 것도, 별 소용이 없을 때가 있다.
그저 이만하면 충분히 뜨거우니, 부디 그만 뒷걸음질 쳐주기를 바랄 뿐이다.
단순한 사랑
가을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가을길 햇빛을 따라
네가 웃으면서
내게로 올 것만 같아서
여름이 어서 갔으면 좋겠다
가을의 옷자락을 밟으며
내가 웃으면서
너를 만나러 갈 수 있을 것만 같아서.
- 나태주, 《단순한 사랑》, 전문
사람은 누구나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받은 사랑을 못 잊습니다.
받은 사랑을
오래 기억하는 까닭입니다.
사랑만이 답입니다.
사랑만이 남습니다.
하므로 우리는 사랑해야 하고
사랑받아야 합니다.
사랑은 결코 무지개가 아닙니다.
우리 가까이
우리 가슴에
늘 준비된 마음입니다.
- 나태주 시집,
《사랑만이 남는다》,
시인의 말 중에서
입추도 지나고 말복도 지났지만, 더위의 위력은 여전하다.
등줄기에, 이마에 땀은 맺혀 흐르고, 매미는 어쩌면 제 생애의 마지막 울음을 더욱 크고 구슬프게 부르짖는다.
저것은 아직까지 짝을 찾지 못한 절규. 그들에게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가끔씩 밥을 챙겨주는 길고양이도 공동 현관 앞에서 높은 소리로 울어댄다.
매미도 고양이도 사람도, 결국엔 사랑을 찾는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줄, 또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그 오묘한 법칙을 체험하고 뼛속까지 느끼고자, 온몸으로, 온마음으로 사랑을 찾아 나선다.
아직은 한껏 달구어진 지열로 인해 발을 내딛는 것조차 쉽지 않다.
물론 어느새 이것이 살을 에는 듯한 한기로 바뀐다는 것은 경험에 의거한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선선한 가을이 오기만을 기도하는 심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이 늦여름이 더 늦어지지 않도록.
입추
깨진 낮달은
따라오는 태양에 밀려나고
이글거리던 여름도
가을 소식에 짐을 꾸린다
잠시 머무르다
떠나야 할 때는 말없이
배역을 마친 후
무대 뒤로 사라지는 계절
반백의 이마 위로
석양 그림자가 드리우고
젊은 날의 추억은
아득히 멀어져 간다
억새 꽃잎에 물든 가을
텅 빈 허전한 가슴
풀벌레 처량한 노래
아! 나도 늙어가고 있구나.
- 박인걸, 《입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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