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번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에드바르트 뭉크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뭉크의 일생과 절규, 불안 등의 대표작과 거기에 얽힌 이야기 등에 대해 궁금하신 분은 아래의 글을 참조하여 주시기 바란다(이승하 시인의 「화가 뭉크와 함께」도 감상하실 수 있다).
2021.08.30 - [이야기가 있는 정원, Art] - ✔에드바르트 뭉크①(Edvard Munch, 절규, 불안, 실존의 고통, 이승하, 화가 뭉크와 함께, 표현주의 미술)
3. 첫 사랑의 기억
뭉크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던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고,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처음에는 오슬로에 있는 기술대학에 들어가 엔지니어의 길을 걸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를 괴롭혔던 잦은 병치레로 인해 학업에 지장을 초래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학교를 그만둔 그는 1881년 왕립미술공예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이때 알게 된 한스 예거(Hans Jæger ; 노르웨이의 작가이자 철학자, 정치운동가)를 필두로 한 극단적 자유주의자 그룹인 ‘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아’에 합류하는데, 이때 예거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당시 젊은 예술가들을 후원한 것으로 유명했던 프리츠 탈로(Johan Frederik Thaulow, Frits Thaulow)에 의해 파리로 보내지게 되는데, 이것은 뭉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경험 중 하나가 된다.
뭉크의 첫 사랑으로 알려져 있는 이가 바로 프리츠 탈로의 형수인 밀리 탈로(Milly Thaulow)인데, 뭉크는 그녀에게 순정적인 사랑을 바치지만, 그녀는 뭉크 한 사람에게 만족할 수 없는 자유분방함을 지닌 사람이었다고 한다.
자유분방한 사람은 대체로 특별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간에 모두에게 친절하거나 모두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따라서 뭉크는 그녀와 만나면서 의심과 질투로 인해 고통스러워 했으며, 아픔으로 가득한 첫 사랑의 날카로운 기억은 향후 그의 여성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후에도 그는 몇몇 여성들과 교제하기는 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으며, 특히 툴라 라르센(Tulla Larsen)이라는 여성과의 교제 중 그녀가 위협했던 권총의 오발로 인해 손가락에 관통상을 입기도 한다(어쨌든 뭉크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 에드바르 뭉크(1863~1944)는 "나는 날마다 죽음과 함께 살았다"고 고백할 만큼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대한 뿌리 깊은 두려움을 안고 살았다. 《마돈나》는 여성과 죽음, 특히 섹슈얼리티와 죽음을 연관시키고자 하였던 뭉크의 의도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걸작이다.
(중략)
뭉크는 성(性)과 사랑에 사로잡힌 죽음의 여신으로 마돈나를 그리고 있다. 그의 작품 《마돈나》에서 성스러운 제목에 어울릴 만한 것은 머리 위에 띠처럼 그려진 붉은 후광뿐이다. 그의 마돈나는 남성을 파멸로 이끄는 사악한 요부이며, 그렇기 때문에 황홀경에 빠진 여인의 모습은 유혹적이지만 반면 위협적이다.
* 출처 : [두피디아], 마돈나, www.doopedia.co.kr
4. 뭉크가 생각하는 대표작,
그리고 그의 말년
앞서 말씀드렸듯이, 뭉크는 자신의 누나를 결핵으로 잃었다.
어린 시절의 이런 어둡고 슬픈 경험은 그에게 강하게 각인되었을 것이다.
자신도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가족을 잃은 절망과 암울함은 이 작품 속에 그대로 녹아있는데, 비록 당시의 평론가들은 이 작품의 묘사에 대해 놀랐다고 하지만, 뭉크 자신은 "이것은 내 작품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중요한 그림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무한한 애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병상에 누워 가쁜 숨을 내쉬며,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는 소녀와, 그녀의 팔을 잡고 흐느끼듯 오열하는 가족의 모습이, 거친 질감의 배경을 통해 잘 표현되어 있다.
평소 조울증과 알콜 중독으로 인해 힘들어했던 뭉크는 신경쇠약까지 겹쳐 1908년 덴마크의 코펜하겐에 있는 병원에 8개월 동안 입원하여 요양치료를 받았는데,
이러한 영향 때문인지 이후 이전과는 달리 그의 작품의 색채가 밝아지고 다양해지는 등, 표현주의적 경향이 다소 줄어들었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또한 이후로는 풍경화나 자화상 등을 주로 그렸다고 한다).
✅ 뭉크는 1933년 70세 생일에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성 올라브 대십자 훈장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1937년 독일의 나치 정부는 뭉크의 그림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독일 미술관에 있는 그의 작품 82점을 압수했다.
말년에 그는 시력을 거의 다 잃었으며, 1944년 1월 23일 오슬로 근처의 에켈리의 집에서 홀로 죽음을 맞았다. 그의 80번째 생일이 지나고 몇 달 뒤였다. 뭉크는 유언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오슬로시에 기증했다. 그의 작품은 1963년 뭉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개관한 뭉크 미술관에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에드바르 뭉크 [Edvard Munch] (두산백과)
“우리는 더 이상 책을 읽는 사람이나
뜨개질하는 여인이 있는
실내 정경을 그려서는 안 된다.
숨을 쉬고 느끼며 아파하고
사랑하는 살아있는 존재를 그려야 한다.”
- 에드바르트 뭉크
* 출처 : [두산백과], 에드바르 뭉크
평생에 걸쳐 엄청난 다작을 해냈으며 - 일테면 「절규」나 「마돈나」도 여러 버전의 작품으로 남아있다 - 그것을 아낌없이 오슬로 시에 기증한 뭉크.
특히 다량의 판화를 제작한 뭉크 덕분에, 이후 판화의 가치 자체가 높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아래의 글을 통해 그의 사후 100년을 기념해 개관한 뭉크 미술관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