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아래 쓰여 있는 각각의 글들은
시에 대한 전문적인 분석이나 해석,
그리고 해설이 아닌
개인의 소소한 감상입니다.
읽는 사람에 따라 내용과 감상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봄밤
말이 되지 않는
그리움이 있는 줄 이제 알겠습니다
말로는 나오지 않는 그리움으로
내 가슴은 봄빛처럼 야위어 가고
말을 잃어버린 그리움으로
내 입술은 봄바람처럼 메말라갑니다
이제 내 피는
그대를 향해
까맣게 다 탔습니다
- 김용택, 《봄밤》, 전문
개인적으로는 사계절 중 가장 즐기기 좋은 밤은 봄밤이 아닐까 싶다.
물론 아직은 해가 질 무렵부터 기온은 곤두박질치고, 함부로 패딩을 벗으면 몸이 떨리며, 잘못하면 감기에 걸리기도 쉽다.
하지만 매섭게 몰아치던 바람의 기운 속에 서서히 훈풍이 끼어들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기 바빴던 몸과 마음도, 전보다는 조금 더 내가 발을 내딛는 그곳에 머무르게 만든다.
공기가 더 후끈해지고, 눈과 입가, 그리고 온 얼굴을 따끔하게 하는 황사의 습격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전 이맘때의 밤이야말로 즐길만하지 않은가.
아직은 나뭇가지에 색색의 등롱같은 꽃들이 피어나지도 않고, 새들의 노랫소리가 흥겹지도 않지만, 봄의 절정까지 기다리면 너무 늦는다.
봄은 짧고, 발걸음은 바쁘다.
봄밤
실버드나무의 거무스렷한 머릿결인 낡은 가지에
제비의 넓은 깃나래의 감색 치마에
술집의 창窓 옆에, 보아라, 봄이 앉았지 않은가.
소리도 없이 바람은 불어, 울며, 한숨 지워라
아무런 줄도 없이 설고 그리운 새카만 봄밤
보드라운 습기는 떠돌며 땅을 덮어라.
- 김소월, 《봄밤》, 전문
2021.06.07 - [이야기가 있는 정원, Art] - ✔카운터테너 최성훈, 개여울(김소월의 개여울, 라포엠, 아이유, 여울목, 추억, 약속, 피아노, 첼로, 크로스오버)
봄밤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봄이었고
다시 밤이었다
창밖에 화르르 꽃이 지고 있었다
귀로 듣는 것이 더 좋은 풍경이었다
오늘 밤에는 정리해야 할 목록이나 적어 볼까
가사는 좋지만 옥타브가 높아
따라 부르지 못하는 노래들이 떠오르고
마음을 주었으나 돌려받지 못한
사내의 얼굴도 스쳐간다
오늘 하루쯤은 미리 서러워하거나
무엇과도 화해하려고 애쓰지 말자
피었다 지는 꽃의 발자국 소리만으로도
몸이 후끈 뜨거워지는 밤이다
- 홍경희, 《봄밤》, 전문
💬 홍경희 시인은 제주도 귀덕에서 태어났다. 2003년 《제주작가》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 『그리움의 원근법』을 냈다.
* 출처 : [교보 문고], 작가 소개
돌이켜보면 이 삽 십 년도 훌쩍 가버렸는데, 봄날 그리고 봄밤은 말할 것도 없이 정말 눈 한 번 깜빡하는 시간 동안 머무는, 뭐랄까, 흘러넘치기 직전의 눈물 같은 것이다.
꽃이 한창이니 밖에 나가서 맘껏 즐겨보세요, 하는 소리를 듣고 나가면 어느새 봄은 들녘 저편으로 사라질 것만 같다.
내게 있어 봄이라는 계절은 삽시간에 피었다 지는 꽃망울, 또는 날카롭게 스쳐 지나가는 어떤 기억 같은 것.
봄이 정말 바쁘게 뛰어갔다가 제대로 숨도 고르지 않고 가버리기 전에,
어쩌랴, 설익은 봄밤이나마 최대한 붙잡고 있을 수밖에.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