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풍의 건물 안에서 세 명의 인물이 둥근 탁자앞에 둘러앉아 있다(그들이 앉은 의자는 팔걸이와 등받이가 없는 스툴 같은 것이다). 성별은 물론이고 가죽인지 새의 깃털(혹은 날개처럼 보이기도 하는)인지 불분명한 이들의 의복, 그리고 퀭한 두눈과 바싹 마른 몸은 어딘지 모르게 우리들의 시대와는 유리된 것 같은 그로테스크함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레메디오스 바로(Remedios Varo)의 《채식주의 흡혈귀 Vampiros Vegetarianos》(1962) 라는, 그림의 작가와 제목을 알고 다시 한 번 이 작품을 보면, 그 유머러스함에 살짝 미소를 짓게 되지 않을까?
흡혈귀로 지칭되는 세 명의 존재들이 긴 빨대를 꽂아 죽죽 들이키고 있는 것은, 영화나 게임, 그리고 문학작품 등에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간이나 짐승의 '혈액'이 아닌, 수박, 토마토 등의 과채류(채소에 열리는 열매)의 '즙'인 것이다.
게다가 그 과채류의 색깔도 혈액을 연상케하는 붉은 빛이다.
또한 그들이 앉아있는 의자의 아래에는 고양이 두 마리가 있는데, 이들과 튜브 비슷한 것으로 연결되어있다. 육식성인 고양이들조차, 주인(?)들을 따라 강제로 채식을 흡입하고 있는 중이다.
■ 그로테스크함과 유머러스함이 공존하는 이 그림의 작가는 스페인 태생의 초현실주의 화가 레메디오스 바로(Remedios Varo, 1908~1963)이다.
사실 그녀는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트 등과 동시대의 인물로, 뉴욕 현대미술관, 파리 퐁피두 센터 등 여러 유명 미술관에서 그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명성이 있으나, 국내에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에 대한 참조글 :
1. 유년기와 청년기, 그리고 망명
유년기의 그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가족은 아마도 아버지일 것이다.
유압 엔지니어로 일했던 아버지로 인해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스페인을 비롯하여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자주 이사를 다녔다고 한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그녀의 예술적 재능을 일찍부터 인정했고, 동시에 독립적인 사고력을 키워주기 위해 과학관련 도서, 모험에 관한 도서, 특히 알렉산드르 뒤마와 쥘 베른, 애드거 앨런 포의 소설들로 그녀의 흥미를 유발시켜 주었다고 한다(아아, 개인적으로 너무나 부러운 아빠. 나는 어렸을 적 뒤마와 베른, 포의 소설들을 아빠 몰래 읽었어야 했는데).
그녀는 8세 때 당시의 영특한 여성들(그리고 생활에 어느 정도의 여유가 있었던 가정에서)이 의례 거쳐갔던 고급교육기관, 즉 전형적인 수녀원 학교(수도원 학교)에 들어가게 되지만, 엄격한 통제와 규율 속에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아마도 그녀가 수녀원 학교에 들어간 것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일 것이다).
어쨌든 21세에 미술학교의 동급생과 결혼한 그녀는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게 되는데, 바로 이곳에서 초현실주의를 접하게 되어 많은 영향을 받는다.
1년 후 남편이 일자리를 얻어 다시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 당시 유럽 아방가르드 운동의 중심지 였던 - 로 이주하게 된 그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스페인 내전.
역시 스페인에서도 오래 정착하지 못했던 그녀는 이듬해 다시 파리로 건너와 앙드레 부르통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초현실주의 그룹과 만났으며, 이후 2차대전의 발발로 인해 멕시코로 망명하게 되기 전까지 투옥 등 갖은 고생을 하며 삶을 이어나갔다.
2. 멕시코, 그리고 레오노라 캐링턴
영국 태생의 초현실주의 화가로서, 한 때 막스 에른스트(Max Ernst)의 연인이었으나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1941년 위장결혼을 한 후 멕시코로 도피해있던 레오노라 캐링턴(Leonora Carrington)을 만난 것은, 어쩌면 레메디오스 바로의 고단한 삶 속에서 한 줄기 빛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프랑스에서 친분을 쌓은 바가 있는, 게다가 삶에 있어서 비슷한 경험을 한(수녀원 학교, 미술학교, 그리고 전쟁의 참화를 몸소 겪은)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 1941년 캐링턴은 멕시코의 외교관 레이몬드 레독(Raymond Leduc)과 위장 결혼하여 멕시코로 건너가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프랑스에서 알게 된 레메디오스 바로(Remedios Varo)를 만났다.
두 사람은 신비주의와 연금술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함께 작업하면서 자전적이고 밀교적인 환상적 초현실주의를 발전시켜 나갔다.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레오노라 캐링턴 [Leonora Carrington] (두산백과)
멕시코로 도피할 때까지만 해도 레메디오스 바로는 전쟁으로 인해 받은 충격과 상처가 큰 나머지, 멕시코에서의 생활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그녀는 베네수엘라에서 보낸 1년을 제외하고, 평생을 멕시코에서 살게 된다(출처 : [위키백과], 영어, Kaplan, Janet A. (1988). 예기치 않은 여정 : Remedios Varo의 예술과 삶). 운명이란 참으로 얄궂은 법.
멕시코에서 인생의 동료를 비로소 만난 바로는 자신의 여러 작품에 (여성으로서의) 어린 시절, 삶의 과정, 그리고 일상 등을 중세적이고 고딕적인(그리고 연금술, 점성술, 그리고 신비주의적인) '꿈'의 터치로 담아내기 시작한다.
3. 창조하는 주체로서의 여성(ft. 환상을 만들어내는 연금술사)
당시 많은 남성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성적욕망의 무의식적 상징으로서 여성의 누드를 종종 표현한 것과는 달리, 바로는 남성에게 종속되어 있거나 부차적인 존재로서의 여성이 아닌, 예술이든 연금술이든 그 무엇이든, 스스로 영감을 받아 창조가 가능한 주체로서의 여성,
즉 자신의 작품 곳곳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자 했다.
연구실 같은 곳에 앉아있는 반인반조(半人半鳥)의 존재.
그의 옆에는 쉼없이 물감을 파레트에 뽑아내는 기계가 있고, 그는 그것으로 종이에 새의 그림을 그린다.
자세히 보면 그의 목에는 바이올린이 걸려있고, 그 바이올린과 펜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펜 끝에서 새들은 창조되고, 마침내 창문 밖 세상으로 날아간다.
온갖 환상과 상징, 그리고 은유로 가득한 이 작품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사랑했던 무의식이 어떻게 예술적 창조의 힘으로 승화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다시피, 꿈의 세계를 자신의 창조의 원천으로 사용하는 것은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이미 흔한 일인 것이다(《드라큘라》의 작가 브램 스토커도 불쾌한 꿈을 꾼 뒤 이 작품을 집필했다는 말이 있으며, 《에일리언》을 창조한 H.R. 기거도 자신의 악몽을 이 캐릭터에 구현했다).
■ H. R. 기거에 대한 참조 글 :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이 인물의 오른 손에는 뜻밖에도 곤충을 채집할 때 쓰는 채집망(흔히 잠자리채라고 부르는)이 들려있고, 왼손에는 이미 채집한 별이 하나 들어있는 채집통이 들려있다.
하지만 이 인물은 아직 만족하지 못한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뜬 채 다시 한 번(혹은 어두운 밤 내내) 밖으로 나갈 준비가 되어있는 듯, 결의에 가득 차 있다.
이처럼 그녀의 작품들은 영감, 창조, 생산, 발명 등의 주체로서의 여성, 혹은 나를 상징하고 있다(개인적으로 나는 그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을 내 마음속 아니마(Anima)로 생각하겠다).
우리들은 모두 의식하지 못하는 꿈의 세계를 걷는 여행자이고, 그 여행은 깨달음과 영감, 그리고 창조로 가득한 연금술의 정원으로 우리들을 인도해준다.
부모의 영향을 받았으나 우리들은 모두 독립된 인격체이고, 독립된 인격체이지만 타인과 상호작용하면서 인생을 배운다.
우리들은 유전적이고 생물학적인 존재인 동시에, 나를 둘러싼 환경에 강력한 지배를 받으면서 성장하는 총체적인 존재이다.
즉,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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