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사랑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 부는 저녁 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 도종환, 《가을 사랑》, 전문
사랑을 하기에 좋은 계절은 따로 없지만, 기분 탓인지 몰라도 조금은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이 왠지, 사랑과 잘 어울리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작열하던 더위, 마구 퍼붓던 폭풍우의 계절이 이제야 조금씩 식는다. 잠시 한여름으로 되돌아갔던 계절의 시계도, 겨우 제자리로 돌아왔다.
말하자면 이 시에서 다루는 사랑은 '격정'이라기보다는 그 격정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서서히 편안해지는 그런 시기라고 생각한다.
잔잔한 물결 위로 비치는, 지나치게 뜨겁지 않은 햇살. 사랑도 오래되면 그렇게 넉넉해지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여기서 '갈꽃'은 '갈대의 꽃'을 말하며, 솜과 같은 흰 털이 많고 매우 부드럽다고 한다(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갈꽃이 피는 시기는 8월~9월, 딱 이맘때이다. 결코 눈부시지는 않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아니 바라볼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는 갈꽃처럼 불안하지 않은 사랑을, 누구나 꿈꿀 것이다.
당신의 눈물
당신이 나를 스쳐보던 그 시선
그 시선이 멈추었던 순간
거기 나 영원히 있고 싶어
물끄러미
물
꾸러미
당신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 것인
물 한 꾸러미
그 속에서 헤엄치고 싶어
잠들면 내 가슴을 헤적이던
물의 나라
그곳으로 잠겨서 가고 싶어
당신 시선의 줄에 매달려 가는
조그만 어항이고 싶어
- 김혜순, 《당신의 눈물》, 전문
💬 김혜순은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을 통해 시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또 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 『우리들의 陰畵』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 기계』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한 잔의 붉은 거울』 『당신의 첫 』 『슬픔 치약 거울 크림』 『피어라 돼지』 『죽음의 자서전』, 시론집으로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산문집으로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현대 시작품상, 소월시문학상, 미당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동화책으로 『불휘와 샘물이의 잉카 여행』이 있다.
* 출처 : [교보문고], 작가 소개, 김혜순
제 아무리 그렇지 않은 척 노력해도, 관심이 가는 사람에겐 어쩔 수 없이 나의 시선이 머물게 된다.
그 짧은 순간 - 어쩌면 착각일 수도 있는 - 은 영원처럼 남아 자꾸 마음을 흔든다.
물론 상대를 뚫어져라 보는 사람도, 그 마음 들키지 않으려고 딴청을 피우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엔 마음이 먼저 빠지고, 그 사람의 주변에 최대한 머무르려고 하며, 어쩔 수 없는 가슴앓이를 하게 된다.
우리는 보통 사랑을 '한다'라고 하지 않고 사랑에 '빠진다'라고 표현한다. 수영을 못하거나 물이 두려우면 물리적으로 그곳을 멀리하면 되지만, 피어오르는 사랑은 그 대상이 곁에 있든 없든,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시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물'에 비유하고 있다. 아름답고 치명적이며, 절묘하다.
당신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 것인/
물 한 꾸러미/
그 속에서 헤엄치고 싶어/
잠들면 내 가슴을 헤적이던/
물의 나라/
그곳으로 잠겨서 가고 싶어/
사랑은 거기에 푹 잠기기 전까지, 푹 잠겨서 상대의 시선의 줄에 매달려 가기 전까지, 좀처럼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다.
푸른 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 나희덕, 《푸른 밤》, 전문
💬 시인 나희덕은 1966년 2월 8일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시집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 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파일명 서정시', '가능 주의자' 등을 발표했으며,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출간했다. 김수영문학상 · 김달진문학상 ·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출처 : [교보문고], 작가 소개, 나희덕
외적으로는 굳센 것처럼 보이지만, 어쩔 수 없이 흔들리는 내면의 풍경.
일부러 멀리 돌아가는, 빙 둘러서 가는 우회로를 뜻하는 '에움길'처럼,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경험을 해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삶은 온통 고민의 연속이다.
모든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해내려고 하면 할수록, 지름길을 놔두고 어쩐지 나 혼자 우회로로 빠져서 터덜터덜 걷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두려워지기도 한다.
사랑도 깊어갈수록 기쁨보다는 불안이 엄습한다.
후회와 절망, 그리고 상처를 동반하게 되는 것이 사랑이다. 반드시 연애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랑이라 이름지어진 모든 것들이 그러하다.
사랑
피흘리지 않았는데
뒤돌아보니
하얀 눈 위로
상처 입은 짐승의
발자국이
나를 따라온다
저 발자국
내 속으로
절뚝거리며 들어와
한 마리 짐승을 키우리
눈 녹으면
그제야
몸 눕힐 양지를
찾아 떠나리
- 나희덕, 《사랑》,전문
💬 나희덕 시인이 등단 26년 만에 낸 첫 시선집. 그동안 발표해온 시집들과 2014년 미당문학상 수상작「심장을 켜는 사람」을 비롯한 신작시들 가운데서 ‘여성성’을 주제로 엄선된 작품을 실었다.
선별된 시들의 내면풍경과 닮아 있는 회화 작품들은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성 화가들-지지 밀스, 카렌 달링, 엘리너 레이, 니콜 플레츠-이 영어로 번역된 시인의 시를 읽고, 깊은 공감을 표하며 적극적으로 협조했다고 한다.
* 출처 : [교보문고], 책 소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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