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엽서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것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 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 안도현, 《가을 엽서》, 전문
가을, 이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한낮의 태양은 뜨겁다.
개인마다 체감하는 온도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아침저녁의 서늘함 때문에 입고 나왔던 겉옷이 아직은 귀찮을 정도다.
겉옷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가, 어라 제법 쌀쌀하네, 하고 다시 입었다가, 조금 걷기라도 하면 등과 겨드랑이에서 금방 땀이 배어 나와서 난처한 요즘이다.
그래도 한 여름에 비하면 같은 온도라도 이제는 태양의 기세가 그리 맹렬하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다.
여행지에서, 또는 안부가 궁금한 그리운 이에게 몇 자 적어 보내고는 했던 '엽서'는 이제 sns에 밀려 뒤안길을 걷고 있다.
엽서의 '엽'자는 '잎사귀'를 뜻하는 '엽(葉)'자이다.
굳이 풀어쓰자면 '잎사귀에 쓰는 글'이라는 뜻이다. 어렸을 적 가을에 지상으로 내려온 나뭇잎을 주워서 문방구에서 코팅을 했던 추억이 떠오르는데, 엽서에는 짧지만 여운이 남는 문장들이 많았다.
물론 엽서에는 좋은 시구들이 적혀있기도 해서, 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색다른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대여/
가을 저녁 한 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낙엽은 공중에서 지상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진다. 바로 그 찰나와 같은 순간, 시적 화자는 사랑을 떠올리고, 그것은 언제나 낮은 곳에 있다고 노래한다.
때로는 화사하고 눈부시지만, 또 때로는 건조하고 버석버석한 사랑의 모습들.
사랑
둘이 같이 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문득 정신 차려 보니
혼자 걷고 있었습니다
어느 골목에서 다시 만나지겠지
앞으로 더 걷다가
갈증이 나서
목을 축일 만한 가게라도 만나지겠지
앞으로 더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참 많이도 왔습니다
인연이 끝나고
계속 앞으로 걸어간다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온 길을 되짚어 걸어가야 합니다
많이 왔을수록
혼자 돌아가는 길이 멉니다
- 양애경, 《사랑》, 전문
💬 양애경 작가는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불이 있는 몇 개의 풍경』 『사랑의 예감』 『바닥이 나를 받아주네』 『내가 암늑대라면』 『맛을 보다』가 있다.
한성기문학상, 애지문학상, 충청남도 문화상, 대전시 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전 한국영상대 교수이다.
* 출처 : [교보문고], 작가 소개, 양애경
이별 후, 대부분의 사람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시간을 보낸다.
그 사람과 함께 걷던 길, 함께 웃고 울고 떠들던 공간, 그리고 아무리 떠올리지 않으려고 해도 자동으로 재생되는 그 사람과의 여러 장면들에 젖어 또 울고 웃는다.
그 사람과의 이별을 털어내려고 일에만 전념하기도 한다. 일부러 사람들 속에 섞여서, 전보다 더 큰소리로 파이팅을 외치며 어렵고 힘든 과제에 도전한다. 하지만, 누구나 혼자가 되는 시간은 오는 법.
위 시의 내용처럼 생각 없이 걷고 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사람과 둘이서 오고 가던 길과 그 길 가운데 둘이서 종종 머무르던 장소가 어느새 발아래, 눈앞에 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 또 모를까, 도저히 '그땐 그랬지'하며 미소를 지을 수 없는 내 자신이 미워져서 화가 나고, 아직도 추억 속에서 헤매고 있는 내 자신이 초라해져서 또 눈물이 난다.
인연이 끝나고/
계속 앞으로 걸어간다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온 길을 되짚어 걸어가야 합니다/
많이 왔을수록/
혼자 돌아가는 길이 멉니다/
그렇다. 우리는 언제나 온 길을 되짚어 걸어가야만 하는 존재다.
또 다른 인연을 만난다고 하여도, 그 메커니즘은 반복된다.
깊이 사랑했으므로,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미워했으므로, 되짚어 돌아가는 그 길이 멀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사랑이
사랑이 시작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리
다시 외로워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리
외딴섬 지독한 고독만이 어둠 속에 빛이어도
밀어닥치던 사랑이 나를 축복하고 떠나도
하얀 낙화 천천히 배경으로 물러나도 사랑이 시작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리
- 홍성란, 《다시 사랑이》, 전문
💬 저자 홍성란은 1958년 충남 부여군에서 태어났다. 1989년 중앙시조백일장으로 등단했고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국문과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하여 ‘시조의 형식실험과 현대성의 모색 양상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첫시집 『황진이 별곡』 이후 『따뜻한 슬픔』 『겨울 약속』 『바람 불어 그리운 날』 『춤』을 냈다. 시선집으로 『명자꽃』 『백여덟 송이 애기메꽃』이 있다.
현대시조감상에세이 『백팔번뇌-하늘의 소리, 땅의 소리』 등의 저서가 있다. 대산창작기금, 제 1회 유심작품상, 중앙시조대상, 이영도 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에서 시조를 가르치며 유심시조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 출처 : [교보문고], 작가 소개, 홍성란
정말, 두 번 다시는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그때는 생각하지만, 모든 것은 나선계단처럼 반복되듯이, 그렇게 다시 사랑이 찾아오기도 한다.
누구나 혼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종종 철저하게 혼자가 되는 경험도 한다.
하지만 혼자가 되는 것이 슬플 수는 있어도, 그것이 곧 불행은 아니다.
원없이 사랑했으므로, 이별 후 아픈 것이 당연하다. 언제나 꿈꾸던 이별이었다면 아플 이유도 없고, 단지 헤어질 것이 두려워 억지로 그 관계를 이어나간다고 한다면 그것은 더 큰 문제이다.
멀리서 빈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 나태주, 《멀리서 빈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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