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아래 쓰여 있는 각각의 글들은
시에 대한 전문적인 분석이나 해석,
그리고 해설이 아닌
개인의 소소한 감상입니다.
따라서 시의 내용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겨울비
3층, 밖을 내려다본다.
무슨 놈의 겨울비가
이리 거칠게 내린담
한밤 내내
일필휘지로 갈겨쓰는,
그것을 순순히 받아 적는 땅을 바라본다.
머물 수 없음에 스치듯 만나
나를 기억하는 짧은 그 순간에도
저리 거칠게
나도 네 가슴을 후벼 팠으리
설령 우리 잠시 머물며 떠나야 하더라도
땅이 가슴 열어 저리 고이 품듯
지금은 순하게 너를 품으라고
겨울비가 나를 고쳐 쓰고 있다
- 박순영, 《겨울비》, 전문
내리던 진눈깨비가 늦은 오후가 되니 약한 빗방울로 바뀌었다.
외부로 노출된 도시가스 배관의 끝자락을 툭툭, 하고 빗방울이 천천히, 하지만 꽤 묵직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밖을 내다보니 진회색의 세상이 물감이 번져나가듯 축축하게 물들고 있다.
도시의 어스름을 적시는 비는 늘, 나의 마음을 눅눅하게 만든다.
간간히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뒷덜미에, 하나둘 켜지는 건물의 조명들 위에, 빗방울은 떨어진다.
잠시 하늘을 올려보다가, 중산모를 쓰고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긴 레인 코트를 입은 똑같이 생긴 남자들이 비처럼 내리는(혹은 떠있는) 르네 마그리트의 유명한 작품, 「골콩드(Golconde, 1953)」 또는 「겨울비」를 떠올렸다.
나의 하루가 그렇듯 나 또한 그 풍경의 뻔한 일부가 된다.
이미 삭아버리고 없는 줄 알았던 내 몇몇 장면들이 다시 재생된다.
밤은 길고 겨울비는 내린다.
그대 겨울비로 내리면
너무 오래된 그리움이
또다시 그대 품속을 헤매일 때
몇 장 남은 낙엽마저
저녁으로 저물어 가네
낙엽만큼 말라 가고
저녁만큼 저물어 가는
너무 오래된 가슴으로
그대 겨울비로 내리면
차가운 가슴 깊숙이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너무 오래된
내 외로움도 젖어가네
그대 뒤로 무수히 쌓여 간
눈물의 무게가
하도 무거워
그대 겨울비로 내리면
그리움에 눈물짓고
외로움에 가슴 떨던
너무 오래된 내 사랑도
차가운 빗물로 하염없이 젖어가네
- 이채, 《그대 겨울비로 내리면》, 전문
그리움도 너무 절절하거나, 너무 오래되면 그것이 그리움인지 무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내리는 겨울비는 갈갈이 찢어진 채 내 마음속에 파편처럼 박혀 있는 모노크롬 알갱이들을 기어코 끄집어내고야 만다.
그리고 그 모노크롬 알갱이들, 예컨대 내 지난 날들의 몇몇 장면들은 다시 공중으로 올라가, 비가 되어 내 마음으로 다시 착륙한다.
찬물이 몰려오는 졸음을 쫓아주듯이, 이토록 차게 내리는 겨울비가 나를 일깨운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달라졌는가.
겨울비 회상(回想)
그 땐 그랬었지
좋은 곳에 가면
함께 못온 걸
아쉬워했고
좋은 것이 생기면
얼른 달려가
전해주고 싶었고
좋은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알려주고 싶었지
그렇지
그때는 우리가
사랑을 하고 있었지
- 오보영, 《겨울비 회상》,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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