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저귀는 기계
최소한의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사물과 공간들, 거기에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는 새들 - 언뜻 보면 뼈만 남은 생선(?) 같기도 하다 - 이 솟대, 나뭇가지, 혹은 전선 같은 곳에 앉아 각자의 방향을 보며 '지저귄다'.
우리들이 흔히 관찰하는 현실 속의 새도 그러하다. 쉴새없이 머리를 움직이며 목청을 가다듬는 새들.
그렇지만 그 외의 부분들, 색색의 깃털로 뒤덮인 몸과 두 발, 그리고 그 두발로 단단하게 붙잡고 있어야 할 사물들은 마치 그리다 말기라도 한 것처럼 생략되어 있거나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알 수 있는가?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이 《지저귀는 기계》라는 제목이 붙은 이 그림에서 '새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새의 머리가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옆면을 또는 바닥을 향하기도 하면서 사방으로 움직인다. 날개는 보이지 않고 가느다란 선으로 표현된 몸통과 다리는 나뭇가지인지 전선인지 모를 것 위에 올라있다.
새들이 올라선 선은 오른쪽 아래로 꺾였는데 그곳에는 기계를 돌리는 손잡이가 달려있다. 머리에서 몸통과 다리와 전선 혹은 나뭇가지가 손잡이까지 선으로 이어졌다.
선과 선으로 연결된 새의 머리는 모양을 제대로 갖춰 눈이 보이고 부리는 크게 확장됐다. 열린 부리와 그 사이로 길게 뻗은 혀. 선들과 움직임을 통해서 소리가 표현된다.
직선과 곡선, 그리고 새의 깃인 듯 머리 뒤로 뻗친 여러 개의 짧은 직선들과 차츰 두 개로 갈라지며 소용돌이치는 나선. 이 모습이 상상력을 자극해서 새소리를 낸다.
클레는 새에서 소리만 뽑아냈다.
* 출처 : [예술적 상상력 보이는 것 너머를 보는 힘],
오종우, 어크로스, p.77
화가는 대부분의 것들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절제했다.
즉, 최종적으로 소리가 나오는 기관 또는 소리가 외부로 터져나오는 그 순간만을 포착(새들의 머리와 혀를 통해)하여, 마치 우리가 새들의 지저귐을 듣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림의 제목은 《지저귀는 기계》이고, 그림 속에도 언제나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주는 '손잡이' 같은 것이 달려있어서, 이것이 말 그대로 '새의 모습을 형상화한 기계'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는데, 나는 살아있는 실제의 새와 기계 둘 다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클레는 이 그림 속에서 자연 속에 존재하는 유기체, 또는 사물의 작동원리를 동시에 표현해냈고, 마침내 그 소리를 언제나 들을 수 있는 상상력까지 부과했기 때문이다.
2. 파울 클레
🔳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 :
베른 근처 뮌헨부흐제 출생. 현대 추상회화의 시조이다. 어려서부터 회화와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바이올린 솜씨는 전문가 수준이었다.
21세 때 회화를 선택한 후에도 W. R.바그너와 R.슈트라우스, W. A.모차르트의 곡들에 심취,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98~1901년 독일의 뮌헨에서 그림공부를 하고 세기 말의 화가 F. 슈투크에게 사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초기 제작은 모두 어두운 환상적인 판화가 많으며 W. 블레이크, A. V. 버즐리, L. F. 고야 등의 영향이 짙다.
1911년 칸딘스키, F. 마르크, A. 마케와 사귀고, 이듬해 1912년의 ‘청기사’ 제2회전에 참가하였으나 1914년 튀니스여행을 계기로 색채에 눈을 떠 새로운 창조세계로 들어갔다. 1921년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 교수, 후에 뒤셀도르프 미술학 교수가 되어 1933년까지 독일에 머물렀다.
당시 독일에서는 나치스에 의한 예술탄압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로, 102점에 이르는 작품을 몰수당하자, “독일은 이르는 곳마다 시체냄새가 난다”라 말하고 스위스로 돌아갔다.
저술에는 바우하우스에서 강의한 내용을 모은 《조형사고(造形思考) Das bildnerische Denken》(1956) 《일기 Tagebücher》(1957)가 있다. 작품수장집은 스위스의 베른미술관 내 클레재단에 약 3,000점이 소장되어 있고, 대표작은《새의 섬》 《항구》《정원 속의 인물》 《죽음과 불》 등이다.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파울 클레 [Paul Klee] (두산백과)
파울 클레의 집안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자면, 아버지는 주립 사범학교의 음악교사, 어머니는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배우는 음악가였다.
그러한 부모의 영향으로 그도 7세때부터 바이올린 연주를 배운, 거의 프로급의 바이올린 연주자였다고 한다(또한 파울 클레의 부인도 피아니스트였다고 한다).
흔히 말하듯그의 그림에서 통통 튀는 '리듬'이 종종 느껴지는 것은 그의 음악적 재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파울 클레는 현대 추상화의 시조라고 일컬어진다.
그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는 클림트, 뭉크, 칸딘스키, 피카소, 모딜리아니 등등의, 이른바 천재 예술가들의 그것과 겹치는데, 이 시기를 딱히 어떤 유파라고 단정짓고 규정짓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보인다.
(그도 그럴것이, 파울 클레 자신도 표현주의, 입체파, 초현실주의에 속한 다양한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영향을 받았다)
21세 때에 음악이 아닌 그림을 선택한 그는 1898년~1901년, 그러니까 세기말과 세기초의 사이에 그는 독일의 뮌헨에서 그림 공부를 하였고, 화가이자 조각가인 F. 슈투크(Franz von Stuck)의 지도를 받기도 하는데, 슈투크는 당시 상징주의의 대가이자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파울 클레의 초기작(판화)은 어둡고 세기말적인 환상과 풍자가 가득한 작풍을 띠었으며, 블레이크, 고야 등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다.
그 후 몇 년 동안 이탈리아로 연구여행을 떠난 그는 제노바·나폴리·피렌체·로마 등지에 체류하였는데, 이때의 경험은 그의 작품에서 종종 등장하는 배나 고기 등의 모티브를 제공하기도 한다.
1906년 이후 다시 뮌헨으로 돌아온 파울 클레는 1911년 '블라우에 하이터(청기사)'를 설립한 칸딘스키를 알게 되어 교류하게 되고, 이듬해 '청기사' 제 2회전에 참가하게 된다.
3. 나는 화가이다
1914년 튀니지와 카이루안을 여행하게 된 파울 클레는 이 여행에서 큰 감명을 받는다.
선명한 색채를 자각하고, 그 자신의 작풍을 바꾸기에 이르게 되는 그는 이 무렵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썼다.
💬 '빛깔이 나를 갖는다. 나와 색은 일체이다. 나는 화가이다'
* 출처 : [위키백과], 파울 클레
이렇게 파울 클레의 이후 작품은 이전과는 달리 색채가 풍부해지고 화려해졌으며, 단순한 선과 면으로 표현된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종종 "어린아이가 그린 것을 모방한 것"이라는 냉소적인 비판을 받았고, 아무런 배경 지식이 없는 상태로 그의 그림을 접하는 사람은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가전제품이나 스마트 기기들의 변천사를 떠올려보자.
그것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복잡함을 버리고 단순함으로 가고 있다. 일테면 냉장고의 경우 최근에는 그것이 가구인지 가전제품인지, 오브제인지 헷갈릴 정도로 언뜻 보아서는 그 용도를 잘 알 수 없으며,
예전에는 여기저기 불쑥불쑥 튀어나온 버튼들로 정신이 없었던 스마트 기기들도, 이제는 터치패드의 진화로 인해 그것들이 아예 없어졌거나 최소화된 채로 출시되고 있다.
테크놀로지와 예술은 모두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둘은 어느 지점에서는 얼마든지 서로를 벤치마킹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예술도 어느 정점에 오르면 이처럼 절제되고 단순해지며, 과감하게 생략될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의도와는 별도로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어야 한다고 보고, 그림을 보는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단순하고 소박한, 이른바 미니멀리즘만이 앞으로의 예술사조라고 할 수는 없다. 디테일한 것은 디테일한 것대로, 미니멀한 것은 미니멀한 것대로, 각자의 매력과 독특함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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