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아래 쓰여 있는 각각의 짧은 글들은
시에 대한 전문적인 분석이나 해석,
그리고 해설이 아닌
개인의 소소한 감상입니다.
읽는 사람에 따라 감상은 서로 다르며,
시의 내용과는 관계없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
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귓속의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있다 투명 유리조각처럼
- 진은영, 《청혼》, 전문
💬 시인 진은영은 1970년 대전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 『문학과 사회』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와 저서로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문학의 아토포스』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공저) 등이 있다.
대산문학상, 천상병 시문학상, 현대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젊은 시인상을 수상했다. 현재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문학상담 및 인문상담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출처 : [교보문고] 작가 소개, 진은영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것은 일단 너무도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사랑이 어디 그게 다인가.
살아온 배경과 환경이 각기 다른 두 사람이 어떻게 단 한 번도 부딪히지 않을 수 있을까.
서로가 이런저런 일로 투닥거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사랑도 때로는 행복과 더불어 극심한 고통을 수반한다.
뇌의 화학작용이든, 가슴이 시키는 것이든 간에 우리는 사랑을 갈구하고, 위의 시에 나오는 것처럼 단 한 여자, 또는 단 한 남자를 위해 쓴잔을 기꺼이 마시기도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이 지나간 후에 그때를 복기하였을 때 좋았던 장면, 내가 찬연하게 빛났던 한 때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도 참 묘한 일이다.
지나고 나면 내 사랑이야말로 상처투성이였을지언정 아름다웠노라고 기억하고 싶은 심리에서 일까.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날
낡은 수첩 한구석에서 나는 이런 구절을 읽게 되리라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랬던가
너를 사랑해서
너를 그토록 사랑해서
너 없이 살아갈 세상을 상상할 수조차 없어서
너를 사랑한 것을 기필코 먼 옛날의 일로 보내버려야만 했던 그날이
나에게 있었던가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한사코 생각하는 내가
이토록 낯설게 마주한 너를
나는 다만 떠올릴 수 없어서
낡은 수첩 한구석에 밀어 넣은 그 말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 말에 밑줄을 긋고 이렇게 새로 적어놓는다
언젠가 너를 잊은 적이 있다
그런 나를 한 번도 사랑할 수 없었다
- 남진우,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전문
💬 1960년 9월 4일 전라북도 전주 출생.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각각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후 현재까지 시인과 평론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시집으로 '깊은 곳에 그물을 드리우라', '죽은 자를 위한 기도', '타오르는 책'이 있으며, 현재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출처 : [교보문고], 작가 소개, 남진우
흐르는 시간은 그 사랑의 기억조차 무뎌지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그토록 애절하고, 그토록 아프던 가슴도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르면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리거나 낮게 읊조리는 유행가 가사처럼 어딘지 모르게 싱거워지기도 한다.
한겨울에도 빛나는 눈꽃처럼 맑고 투명할 것만 같았던 사랑. 그때 그 사랑은 인생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한동안 매일같이 마음속에서 녹아내렸다, 얼어붙었다를 반복했다.
그래, 어떤 노래가사처럼 정작 미운 것은 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이 아니었던가.
별 1
너무 일찍 왔거나 너무 늦게 왔거나
둘 중에 하나다
너무 빨리 떠났거나 너무 오래 남았거나
또 그 둘 중에 하나다
누군가 서둘러 떠나간 뒤
오래 남아 빛나는 반짝임이다
손이 시려 손조차 맞잡아줄 수 없는
애달픔
너무 멀다 너무 짧다
아무리 손을 뻗쳐도 잡히지 않는다
오래오래 살면서 부디 나
잊지 말아 다오.
- 나태주, 《별 1》, 전문
(전략)
정작 별은 별빛 너머에 있다.
우리의 능력과 시간이 도달할 수 없는 미지의 공간에 있다.
그렇다고 별이 아주 없는 거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별빛 너머에 별은 있다.
있어도 분명히 있다.
의심하지 말아라.
우리의 사랑도 그렇고 인생도 그러하리니.
우리 앞에 다가온 사랑과 인생도
그 표정 너머에 숨겨진 얼굴이 있다고 생각하자.
(후략)
- 나태주, 《별빛 너머의 별》
p.6~7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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