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아래 쓰여 있는 각각의 글들은
시에 대한 전문적인 분석이나 해석,
그리고 해설이 아닌
개인의 소소한 감상입니다.
따라서 시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슬퍼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삶에서 잘못 들어선 길이란 없으니
온 하늘이 새의 길이듯
모든 새로운 길이란
잘못 들어선 발길에서 찾아졌으니
때로 잘못 들어선 어둠 속에서
끝내 자신의 빛나는 길 하나
캄캄한 어둠만큼 밝아오는 것이니
- 박노해, 《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 전문
가을이 다가왔다가 다시 도망친다.
나무들은 우수수, 제멋대로 잎을 떨구며 연신 쌀쌀하다고, 그렇게 너도 곧 쓸쓸해질거라고 외친다.
나는 그 외침을 짐짓 못들은 것처럼 한귀로 흘려버리고, 네 걱정이나 해, 하고 나지막히 응수한다.
잠시 그 나무 앞에 멈추어 선다. 동물의 털처럼 나무도 봄잎, 여름잎, 가을잎, 그리고 외투처럼 따뜻한 겨울잎이 따로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사시사철 크리스마스 전구를 뒤집어 쓰기 전의 나무를 나는 기억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쩐지 든든하게 나를 지켜주는 것만 같았던, 고양이들의 요란스런 휴식처를 자처했었던, 그래서 아직도 녀석들의 발톱 자국과 털뭉치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를 비밀의 나무는 세월 속으로 사라졌고, 이제는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린 채로 나를 본다.
색색의 전구가 뿜어내는 찌릿찌릿한 전기를 참아내며 어젯밤도 꼬박 세웠을 나무. 나무나 나나, 어떤 작은 위로의 말이라도 듣는다면, 금새 오열하며 무너질 것만 같다.
너는 나를, 나는 너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구나.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래 너는, 적어도 내게 있어 이미 시(詩)와 같다. 보면서도, 읽으면서도 언제나 그리움을 불러 일으키고 있으니.
무화과 숲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 황인찬, 《무화과 숲》, 전문
💬 201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구관조 씻기기』 『희지의 세계』 『사랑을 위한 되풀이』 『여기까지가 미래입니다』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 출처 : [교보문고], 작가 소개, 황인찬
사랑은 처음에는 설렘이지만, 갈수록 신앙과 같이 절박해진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계, 사랑.
그 시작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끝은 너무나도 강렬하게 떠오르는 옛사랑.
상처가 채 낫기도 전에 그 자리에 다시 생채기가 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기원하게 되는 사랑.
전혀 관련 없을 것 같은 어떤 장면, 타인의 어떤 말 한 마디에 다시 빠지게 되는 생각의 수렁.
그래도 아름다웠던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사랑.
그리고 웃으면서 울게 되는 이상한 감정, 사랑.
어두워진다는 것
5시 44분의 방이
5시 45분의 방에게
누워 있는 나를 넘겨주는 것
슬픈 집 한 채를 들여다보듯
몸을 비추던 햇살이
불현듯 그 온기를 거두어가는 것
멀리서 은수원사시나무 한그루가 쓰러지고
나무껍질이 시들기 시작하는 것
시든 손등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
5시 45분에서 기억은 멈추어 있고
어둠은 더 깊어지지 않고
아무도 쓰러진 나무를 거두어가지 않는 것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뼈와 살
비로소 아프기 시작하고
가만, 가만, 가만히
금이 간 갈비뼈를 혼자 쓰다듬는 저녁
- 나희덕, 《어두워진다는 것》,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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