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아래 쓰여 있는 각각의 글들은
시에 대한 전문적인 분석이나 해석,
그리고 해설이 아니라
개인의 소소한 감상일 뿐입니다.
호두에게
부러웠어, 너의 껍질
깨뜨려야만 도달할 수 있는
진심이 있다는 거
나는 너무 무른 사람이라서
툭하면 주저앉기부터 하는데
너는 언제나 단호하고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
한 손에 담길 만큼 작지만
우주를 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너의 시간은 어떤 속도로 흐르는 것일까
문도 창도 없는 방 안에서
어떤 위로도 구하지 않고
하나의 자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결코 가볍지 않는 무게를 가졌다는 것
너는 무수한 말들이 적힌 백지를 내게 건넨다
더는 분실물 센터 주변을 서성이지 않기
'밤이 밤이듯이' 같은 문장을 사랑하기
미래는 새하얀 강아지처럼 꼬리 치며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새는 비를 걱정하며 내다 놓은 양동이 속에
설거지통에 산처럼 쌓인 그릇들 속에 있다는 걸
자꾸 잊어, 너도 누군가의 푸른 열매였다는 거
세상 그 어떤 눈도 그냥 캄캄해지는 법은 없다는 거
문도 창도 없는 방 안에서
나날이 쪼그라드는 고독들을
- 안희연, 《호두에게》, 전문
💬 안희연(安姬燕) 시인은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이 있다.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 출처 : [교보문고], 작가 소개, 안희연
작년 이맘때도 그랬던 것 같은데, 올해도 겨울은 많이 맵지 않았고, 벌써 봄의 한가운데를 한창 지나고 있는 것 같은 날들이다. 특히 오늘은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두터운 겉옷을 벗고는 싶지만 오래 벗으면 체온 조절이 잘 안 되는 탓에 감기에 걸릴 것 같고, 그렇다고 계속 입고 있으면 겨드랑이며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도 하니,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요즘이다.
나 또한 위의 시에 비쳐본다면 거의 물러터짐의 끝판왕쯤 되니, 아무리 마음을 다잡네 어쩌네 해도 다리에 힘부터 풀리는 건 예사고, 이른바 감정의 뒤끝도 오래가는 편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나이가 먹어갈수록 더 단단해지고 덜 예민해질 줄 알았지만 현실은 정 반대인 게 사실이다. 아, 물론 나만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어느 노랫말에도 있는 것처럼, 고통이나 시련같은 것들을 마음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실제로는 거의 피해갈 수 없다.
나태주 시인은 그의 저서 「자기돌봄의 시」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 지금 ‘나’의 기분이 어떤지 아는가?
‘내 마음’이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준 적 있는가?
남을 배려하는 만큼 ‘나 자신’을 배려하는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사랑하는가?
삶에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진리가 있다면, 인생의 주인공은 ‘나’ 하나뿐이라는 사실이다.
일주일도 못 살고 떠나는 하루살이도, 구석에 핀 풀꽃도 저마다 인생의 주인공은 ‘나’다. 세상의 아주 작은 존재조차 자신을 위해 오늘을 살아간다. 그런데 왜 오직 사람만이 그렇게 살지 못할까?
나 한 사람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맙니다. 어디까지나 내가 있고 나서야 세상이 있는 것이요, 다른 사람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나는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 출처 : [교보문고], 나태주 「자기돌봄의 시」, 시인의 말 중에서
우리는 흔히 누군가가 '나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면 그것을 이기주의나 자기연민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이는 우리가 정작 가장 먼저 위로받아야 할 내 자신은 내버려두고, 우리 자신을 둘러싼 인적 환경이나 관계에 얼마나 집착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물론, 타인에게 지나치게 무감각하거나 무관심한 것은 분명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각자 자신에게 충분하게 손을 내미는 일을 외면하고 타인만을 위해서 산다고 하는 것도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나태주 시인의 아래와 같은 짧은 시를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해보는 것이 어떨까.
행복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의 내가
딱 좋아요
- 나태주, 《행복》, 전문
이것이 단순한 자기만족, 또는 정신 승리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좋든 싫든 마음에 들든 그렇지 않든 지금 여기에서의 나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하지 못하면 그 다음은 없다.
자기 성찰 또는 메타 인지도 먼저 지금 여기에서 느껴지는 나에 대한 것들을 일단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야 철저한 자기 검증이나 공자도 말했듯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죽도록 나를 마음에 안들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에게 자기 성찰의 시간은 요원할 뿐, 언제까지나 오기 어렵다.
마음의 봄이 오지 않은 채 그대로 봄을 맞이하면, 그 봄을 제대로 즐길 수 없듯이 말이다.
고맙다 고맙다 다 고맙다
아주 추운 겨울이었어.
산다는 게 문득 외로워져서 무작정 밖으로 나왔지.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이 불더라.
급히 나오느라 외투를 챙기지 못했는데
덕분에 그동안 나의 몸을 따스하게 감싸주던
두꺼운 외투의 고마움을 알게 되었어.
그런데 추우니까 갑자기 네가 생각나더라.
사랑에 실패한 후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의 소중함을 알려준
이별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어.
쓰린 이별 덕분에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는데
아직도 내 머리 위에서 무너지지 않고
든든하게 서있는 푸른 하늘도 고맙고.
나, 네 생각을 하며 얼마나 걸었을까?
푸른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더니 눈이 내리더라.
그때 또 나는 알게 되었지.
행복도 불행도 언젠가는 모두 사라진다는 사실을.
지금 내가 겪는 외로움도 언젠가는
사라질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
괜히 힘이 나는 거 있지.
결국 인생은 생각하기 나름이더라.
너도 한 번 외쳐봐.
고맙다 고맙다 다 고맙다.
이 세상은 고마운 것 투성이다.
- 김종원, 《고맙다 고맙다 다 고맙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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