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동네를 돌아다니는 길냥이들만 쫓아다니다가 작년 여름, 고민 끝에 우리를 졸졸 따라다니는 코숏 삼색이 암컷 한 마리를 입양했다.
일부러 시간이 날 때마다 간식을 주머니에 넣고 10분이 넘게 걸어서 방문했던 옆동네는 - 노인정을 중심으로 길고양이가 모이는 곳이 있다 - 녀석과 한 가족이 된 지 어언 7개월째, 자연스럽게 발길을 끊게 되었다.
그야말로 집앞에 어느 날 갑작스럽게 나타난 녀석은 스스럼없이 다가와 몸을 비벼댔고, 우리로 하여금 땀이 밴 팔다리에 한 움큼의 털을 붙이고 귀가하는 매직(?)을 선사하게 되었다.
튜브형 간식에 이끌려 다가오는 것이 틀림없었을지라도, 하루 이틀 그렇게 인연을 이어가다보니 길냥이를 입양하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없던 우리가 드디어 꿈에서조차 녀석과 뒹구는 날이 잦아졌고(우리는 번갈아가며 잠꼬대로 녀석을 불러댔다. 서로가 증인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인생에서 가장 깊은 고뇌와 바닥을 경험하고 있을 무렵, 선물처럼 다가온 꼬질꼬질, 아니 샤방샤방 떼껄룩이었던 것이다.
가히 인생의 전환기라고도 부를 법한 일들이, 녀석이 우리 집에 들어오자 일어났다.
고양이 화장실이며 두부 모래, 밥그릇, 사료, 캣타워, 목욕 등등 초보 집사 두명은 땀을 뻘뻘 흘려가며 폭풍 검색, 좌충우돌, 지금이 여름인지 겨울인지,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녀석의 뱃속에 새끼들이 있는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그 배가 그 배(?)인지 아닌지 육안으로는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 늦여름, 녀석은 온몸이 푹 젖어가며 새끼들을 낳았다.
엄마 젖을 뗄 때 쯤 우리는 눈물콧물 흘려가며 새끼들을 주변에 입양 보냈고, 지금은 한 마리 새끼만 녀석의 곁에 남아 하루 서너 번의 심야 '우다다다'와 레슬링을 직관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 중성화 수술을 하여 더욱 귀족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 녀석을 보며 생각해본다. 오랫동안 온기라고는 없었던 우리들의 삶에 갑자기 나타나 웃음이라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단단한 선물을 녀석은 가지고 온 것이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니까 행복해진다라는 말도 있다.
지금도 컴퓨터 앞에 앉아 때론 발톱을 휘두르며, 때론 멋대로 키보드 자판을 눌러대며 나를 방해하는 녀석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녀석으로 인해 삶에 찾아오는 숙명같은 고통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꿀 수 있었고, 어렵게나마 겨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녀석들의 슬랩스틱 코미디와 치명적인 귀여움으로 인해, 그 상황에서 감정적으로 '잠시' 벗어난 상황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그 웃음이 반복되다보니 거기에 어떤 심리적인 완충지대 같은 부분이 생기고, 점점 진정성이 더해갔으며, 상황이 바뀐 것이 아니라 상황을 바라보는 마음과 관점이 나도 모르게 바뀌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밤과 고양이
고양이가 운다
자기 물음에 스스로 반한 듯
부드럽게
고양이가 길게 울어서
고양이처럼 밤은
부드럽고 까실까실한 혀로
고양이를 핥고
그래서 고양이가 또 운다
- 황인숙, 《밤과 고양이》,전문
살면서 내게는 거의 불가능할 줄 알았던, 이른바 마음을 잠시 내려놓는다는 것을, 그리고 한발 물러나 그 마음을 잠시 고양이처럼 타자화하여 지켜볼 수도 있다는 것을,
녀석들과 투닥거리며 배워가는 요즘이다.
고양이를 키운다는 것은, 내가 그대로 내버려 둔, 내 안의 어린아이도 함께 키우는 일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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