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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정원, Art

✔나혜석, 생애와 작품(나혜석 꼬꼬무, 모던 걸, 신여성, 문물견학, 프랑스, 유럽, 야수파, 인상주의, 헨리크 입센, 인형의 집, 노라를 놓아라)

by 이야기가 있는 정원 2021.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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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화상」, 나혜석, 캔버스에 유채, 62x50cm.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여권운동가, 문필가, 신여성 등등. 그에 관한 수식어는 꽤 많고 사람들의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도 나혜석은 그렇게 기억되고 있는 것 같다.

 

화가면 화가고, 문필가면 문필가지, 직업이나 대표적인 활동 앞에 굳이 성별을 붙이는 이유가 대체 뭘까?

 

아마도 그것은 그 앞에 성별을 갖다붙임으로써, 그동안 유교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당연시되어왔던 역할에서 무언가 어긋나있는, 일테면 별종과도 같은 낙인을 찍으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1. 나혜석 작가의 생애 

 

* 나혜석(1920년 경). 출처 위키백과

 

 

나혜석(羅蕙錫)은 1896년 4월 18일, 현재의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당시 인천부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에서 출생하였다.

 

조부는 호조참판(호구, 공납, 부사, 조세 및 국가 재정과 관련된 부분을 담당하는 관청의 종 2품 당상관직으로, 오늘날의 차관에 해당함)을 지낸 나영완(羅永完)이고, 부친은 시흥군 군수를 지낸 나기정(羅基貞), 모친은 최시의(崔是議)이다. 

 

어려서부터 나혜석은 수원 화성이나 융건릉, 방화수류정 등을 다니며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으며, 사춘기가 되던 무렵 아버지가 자신보다 한 살 많은 첩을 들이자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정조관념과 축첩제도, 가부장적 제도에 수많은 의문을 품게 된다.

 

1910년 삼일여학교(수원 매향중학교의 전신)에 입학한 그는 월간지 《개벽》을 위한 단색목판화 '개척자'를 제작하였고, 같은 해 9월 진명여학교에 편입하는데, 이 때 아명이었던 명순(明順)을 '혜석'으로 개명한다. 

 

일본 도쿄 여자 미술학교 유화과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뒤 1918년 귀국하여 화가, 작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로도 활동하였다. 1919년 3.1 만세 운동에 참가하여 5개월간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그 뒤 1920년 김우영과 결혼, 그와 함께 만주와 프랑스 등을 여행하였으며 그림, 조각, 언론, 문필, 시 등에서 활동했다. 1927년 유럽과 미국 시찰을 가게 된 남편과 함께 여행길에 올라 '조선 최초로 구미 여행에 오른 여성'이라는 칭호를 얻게 됐다.

 

프랑스에 체류하던 중에는 야수파, 인상주의, 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체류 중 외교관 최린과 염문설이 돌았고 곧 귀국 후 그림 활동에 매진하였으나, 결국 이혼하게 된다(뒤에 최린과도 헤어지게 된다).

 

1935년에는 정조 취미론을 발표, 순결과 정조(貞操)는 '도덕도 법률도 아닌 취미'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아내,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순결함을 요구하면서 다른 사람의 아내나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성욕을 품는 한국 남자들의 위선적인 행동에 대한 비판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였고,

 

당사자들의 의견이 존중되지 않고 집안의 뜻에 따라 결혼하는 것에 대한 비판, 가정폭력을 일삼는 남성들에 대한 비판 등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유명한 신여성으로, 뛰어난 그림, 글, 시 등 다방면에 재주를 갖춘 근대 여성이었으며, 여성 해방, 여성의 사회 참여 등을 주장하였고,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 출처 및 참조 : [위키백과], 나혜석

 

 

 

나혜석

[화가 나혜석] 인형이 되기를 거부한 영원한 신여성 - 나혜석(1896~1948) 나혜석은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이며 근대적 여권론을 펼친 운동가였다. 먼저 일본에 유학한 오

terms.naver.com

 

 

 

* 나혜석의 생애를 다룬 유명 프로그램의 요약본. 출처 유튜브 https://youtu.be/rcN6J3ln8w0

 

2. 유학, 여행, 그리고 문물견학

 

그는 여성으로서 처음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했던 한 사람이었고, 자유연애를 추구하는 사람이었으며, 당시 조선사회의 구습이었던 봉건주의와 남존여비 사상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하여 화제가 되기도 한다. 

 

그는 둘째 오빠인 나경석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 도쿄 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도쿄 내에서 결성된 조선유학생 학우회의 기관지 《학지광》에 아래와 같은 글을 기고한다.

 

 

현모양처는 이상을 정할 것도,
반드시 가져야할 바도 아니다.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부덕(婦德)을 장려 한 것이다.

- 《학지광 1914년 12월호》
출처, 위키백과, 나혜석

 

 

쉽게 말해서 이것은 현모양처만이 좋은 여성이 아니라는 외침이었다. 결혼에 대한 아버지의 계속되는 압력과 학비공금 중단, 스스로 학비마련을 위해 일시귀국, 아버지와 첫사랑의 죽음... '적당한 혼처에 시집가서 누군가의 아내로 조용히 사는 것'에 저항한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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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혜석,《스페인 해수욕장》

 

 

그런 그에게 어쩌면, 후에 남편이 되는 김우영과 함께 했던 유럽. 미국 여행과 문물견학이야말로, 진정으로 행복한 시절이었을런지도 모른다. 프랑스 파리에서 인상주의와 야수파를 접한 그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 구미 만유기 일 년 팔 개월 간의 나의 생활은 이러하얏다.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고 빵이나 차를 먹고 침대에서 자고 스켓치 빡스를 들고 연구소를 다니고 책상에서 불란서 말 단자(單字)를 외우고 때로난 사랑의 꿈도 뀌여 보고 장차 그림 대가가 될 공상도 해보았다. (중략) 실상 조선 여성으로서는 누리지 못할 경제상으로나 기분상 아모 장애되난 일이 하나도 업섯다.

* 출처 : [위키백과], 나혜석, 조선인들의 바깥 세상 나들이 中

 

 

 

* 파리체류 시절의 나혜석. 출처 위키백과

 

 

물론 그의 남편 김우영(외교관)은 당시 일본 외무성이 변방에서 일한 관리에게 주는 특별 포상인 해외 위로여행 대상자로서, (포상금을 받아) 나혜석과 함께 1년 8개월에 걸친 시찰 겸 견학을 떠난 것이다.

 

일본 관료의 아내임에도 그는 의열단 등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비밀리에 자금을 송금했는데, 후에 이것이 문제가 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다행하게도 해외시찰 자체가 취소되지는 않았다. 

 

1930년 가을, 그와 김우영은 마침내 이혼도장을 찍고 결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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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형의 집, 노라를 놓아라

 

📝 (전략) 조선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오.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들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이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내가 만일 당신네 같은 남성 이였다면 오히려 호탕한 성품으로 여겨졌을 거외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 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줌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이름을 기억할 것이리라, 그러니 소녀들이여 깨어나 내 뒤를 따라오라 일어나 힘을 발하라.

* 출처 : [위키백과], 나혜석 

 

 

이것은 나혜석이 《삼천리》에 발표한 '이혼 고백장'의 일부이다.

 

는 여기서 자신의 약혼과 결혼, 그리고 이혼에 이르는 과정을 상세하게 기술하면서 당시 조선의 불평등한 남녀관계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많은 욕구와 감정을 삭이고, 아내로서, 모성애를 가진 어머니로서의 삶 - 마치 인형과도 같은 - 만을 강요받던 시절에 '나는 인간이다'라고 선언했던 그.

 

물론 각자의 처지와 입장에 따라, 시대를 앞서 나갔던 그의 생각과 행동들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각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편, 이상적인 아내의 표본은 다를 수 있기에, 그의 주장이 완벽하게 논리적이거나 객관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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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사실 주변을 돌아보면 아직도 연인과 아내, 그리고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로 인지하거나, 이혼한 사람을 무슨 흠결이라도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사실에, 아직도 그의 비판은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에는 현재 그를 기념하는 '나혜석 거리'가 있고 그 거리의 끝, 한 켠에 그의 동상과 시(詩)가 있다. 헨리크 입센의 이 유명한 희곡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를 인용한 그의 외침이 메아리 친다. 

 

 

■ 인형의 가(家)

- 나혜석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기뻐하듯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수하게
엄밀이 막아논
장벽에서
경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남편과 자식들에게 대한
의무같이
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랑의 길로 밟아서
사람이 되고저

(하략)

 

 

◆ 아래는 나혜석의 그림을 감상해 볼 수 있는 곳이다.

https://artsandculture.google.com/search?q=%EB%82%98%ED%98%9C%EC%84%9D 

 

검색 — Google Arts & Culture

온라인 전시회 나혜석: 한국의 대담한 페미니스트 예술가

artsandculture.google.com

 

 

나혜석 - 교보문고

못된 감상기 | 세상의 비난과 질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를 서슴지 않았던 여자. 최초의 여성 유화 전공자로서 서양화가의 길을 당당히 걸었던 나혜석. 그녀는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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