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에 찬 눈동자로 이쪽을 보고 있는 사람은 로댕의 연인이자 모델, 제자로 더 유명했던 프랑스의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이다(20세 무렵).
아니, 어쩌면 '우수에 차있다'라는 그 표현조차도 '비극 또는 슬픔'이라는 잣대 하나로 그녀의 삶을 바라보려는 사견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슬픔도 비극도, 행복도, 환희도, 우리들 삶의 다양함과 복잡함 속에 모두 녹아있는 것이 아니던가.
누구를 막론하고, 사람의 삶은 그리 간단하게 집약.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각자의 개인차가 존재할 뿐.
마치 위의 사진 한 장을 놓고도 보는 사람에 따라, 각자의 느낌이 모두 다를 수 있듯이 말이다.
1. 카미유 클로델의 생애,
그리고 로댕과의 만남
카미유 클로델은 1864년, 공무원(등기소장)인 아버지와 의사의 딸인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다(1남 2녀).
카미유의 어머니는 여동생과 남동생을 편애했는데, 그녀는 어머니와 비교적 적대관계에 있었으며, 이것이 훗날 그녀가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근원적 요인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카미유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보고 사랑을 주었던 이는 그녀의 아버지인 루이 프로스페르 클로델(Louis Prosper Claudel)이었는데, 1879년 조각가인 알프레드 부셰(Alfred Boucher)에게 정식으로 조각 기초수업을 받을 수 있게 도왔다.
1881년 부셰는 카미유가 사립학교인 콜라로시 아카데미(Academie Colarossi)에 입학할 수 있도록 했고, 작업실을 빌려 몇몇 친구들과 조각에 전념했던 그녀에게 종종 부셰가 찾아와 지도를 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그녀의 첫 작품이 탄생하여 프랑스의 권위 있는 미술전람회인 '살롱(Salon)'에 출품하였다.
1883년, 부셰는 로마로 떠나면서 자신의 제자들을 친구인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에게 부탁하였는데, 이것이 카미유와 로댕이 직접적으로 만나게 된 계기가 된다.
이미 20년 간 동거하면서 자신의 아들을 낳은 바 있는 연인(로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댕은 19살의 당당하고 거침없는 태도를 가진 카미유와 불같은 사랑에 빠지고 말았을 뿐만아니라, 작가로서의 그녀의 재능에도 놀라고, 감탄하게 된다.
📝 1885년 카미유는 가족과 상의 없이 로댕의 권유로 로댕의 작업실에서 제자 겸 모델로 활동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로댕과 카미유는 늘 함께 있으면서 애정을 키워나갔다.
24살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둘의 사랑은 더욱 커져갔다. 로댕은 언제나 자신이 참석하는 모든 사교계에 카미유를 동반하고 다니며 카미유가 대단한 조각가임을 주지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미유가 작업실에 나오기 시작하자 여자 모델들의 불만이 터져나왔다. 왜 같은 여자 앞에서 옷을 벗으라는 것이냐는 둥 빈정거리기 일쑤였으며 작업실 분위기는 더욱 냉랭해졌다.
* 출처 : [나무위키], 카미유 클로델 중에서
1887년에 이르러서 카미유는 로댕의 작업실에서 조수로 정식으로 일하면서 로댕의 유명작품인 《칼레의 시민》, 《지옥의 문》, 《입맞춤》 등의 제작에 공동으로 참여했으며, 그녀 또한 이 시기에 《뇌부르그의 광란》, 《이교도의 농지》, 《쿤탈라》 등의 작품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1888년, 마침내 그녀는 살롱에서 최고상을 수상, 조각가로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그녀의 작품은 더욱 독창적이면서도 다양하게 확장되었다.
미술계에서 그녀의 활약이 두드러지자 점차로 둘 사이에는 미묘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1892년, 카미유가 그의 작업실을 나오며 연인으로서의 관계는 끝이 나게 된다.
아티스트로서 독립한 그녀는 1893년 《성숙》이라는 작품을 살롱에 출품하여 극찬을 받았고, 이듬해인 1894년에는 로댕의 부탁으로 벨기에 예술가협회의 전시회에 작품이 초대되기도 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스승과 제자로서 둘 사이의 서신 교환은 지속적으로 이루졌었는데, 1899년 대리석으로 된 그녀의 작품이 전시회 중 도난당하는 일로 인해 로댕과의 관계는 완전히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이 무렵 부르봉가 19번지로 이사를 한 그녀의 생활은 빈곤해졌는데, 거기에다 우울증과 피해망상까지 겹쳐 정신착란에 이르기도 하였다.
📝 1900년 <애원하는 여인>을 제작하고 1905년 알고 지내던 작품 중개상 외젠 블로의 주선으로 블로의 화랑에서 단독 작품전 개최를 제안받았다.
당시 카미유의 생활은 매우 빈곤했는데 로댕의 모델로 있을 때 로댕을 사랑한 나머지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았고 로댕으로부터 독립 후에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겨울에 연료가 끊겨 덜덜 떨다가 싸구려 와인을 연달아 흡입했고 결국 알코올 의존증 증세까지 오게 되었다.
* 출처 : [나무위키], 카미유 클로델 중에서
아티스트이든, 한 인간으로서이든 여성의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로댕의 연인이자 제자. 뮤즈로서의 역할이 끝나자, 그녀의 평가는 박해졌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종종 그녀는 그저 '로댕의 연인'으로만 기억되고는 한다. 너무나도 저평가된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
2. 카미유 클로델의 작품
잘 알려진대로 카미유의 남동생인 폴은 시인이자 외교관으로(당시 청나라의 텐진에서 영사로 근무), 근무를 마치고 프랑스로 돌아와 그녀의 궁핍한 생활을 접하고는 충격을 받아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고, 아버지와 폴의 도움으로 그녀는 그야말로 간신히 연명하며 지내게 되었다.
하지만 1913년, 자신의 재능을 가장 잘 이해하고 아껴주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녀의 증상은 점점 더 심해져서, 마침내 폴이 그녀를 정신병원에 보내게 된다.
📝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로댕은 로즈와 함께 영국 런던으로 피난했으며 카미유는 프랑스 남부 앙김(Enghiem)의 몽드베르그(Montdevergues)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카미유는 이 후 약 30년간 바깥 출입을 금지당하는 등 유폐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 카미유는 폴에게 살기가 너무 힘들고 시끄럽다면서 조각을 하고 싶다고 호소했지만 폴은 묵살했다. 그 와중에 1917년 11월 17일 로댕이 사망했고 1934년 5월 3일 루이즈가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 출처 : [나무위키], 카미유 클로델 중에서
흔히 그녀와 가장 사이가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던 폴 클로델이었지만 그녀의 증세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을 뿐더러, 조각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그녀의 요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카미유는 바로 이 몽드베르그 수용소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자의가 아닌 타의와 상황에 따라 강제로 30년간 작품 활동을 할 수 없었던 그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나로서는 감히 추측조차 하기가 어렵다.
그녀의 작품은 그저 경이롭다, 아름답다, 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디테일함이 있다.
조각상임에도 불구하고 유려하게 표현된 인체의 굴곡, 마치 살아있는 듯한 표정과 역동성이 보는 사람을 첫째로는 멍하게 만들고, 둘째로는 감탄을 자아나게 한다.
오랫동안 영향을 주고 받은 로댕과의 접점이야 분명히 있었겠지만 단순히 로댕의 뮤즈. 모델이라고만 하기에는, 그녀의 비범함과 독창성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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