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성후만흥(堂成後漫興)
맞이하지 않아도 청산이 창으로 들어오고
온 산에 꽃들은 단정하게 바라보이네
앞 여울 물소리 늘 소란하다 싫어하지 마시오
내게는 때마다 세상의 소음 안 듣게 해준다오
入戶靑山不待邀
입호청산불대요
滿山花卉整容朝
만산화훼정용조
休嫌前瀨長喧耳
휴혐전뢰장훤이
使我無時聽世囂
사아무시청세효
- 윤선도(尹善道), 《당성후만흥》, 전문
✅ 윤선도(1587~1671) :
조선 중기의 문신 ·시인.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에 해박하고 의약 ·복서 ·음양 ·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에 뛰어나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사후인 1675년(숙종 1)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다.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윤선도 [尹善道]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이 한시의 제목인 '당성후만흥(堂成後漫興)'의 뜻은 '자신의 집을 짓고 나서 흥에 겨워' 정도로 해석하시면 된다.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문신인 고산 윤선도는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것이다.
특히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 즉 윤선도가 생전에 일곱 차례나 왔다갔다 하면서 13년 동안을 머물렀던 바 있는 보길도(甫吉島)에는 현재 '보길도 윤선도 원림'이라는, 그와 관련된 명승지가 있어 많은 이들이 그곳을 찾는다.
강직한 성품을 지닌 그는 시비를 가림에 있어 타협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여, 치열한 당쟁의 한복판에서 자주 유배를 당했으며, 발언 또한 거침이 없었고 형식 또는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행동으로 인해 적을 많이 만들기도 했다.
💬 한편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풍류인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남긴 시조 75수는 국문학사상 시조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시조는 정철의 가사와 함께 조선 시가에서 쌍벽을 이루는 것이었다. 자연을 소재로 지은 시조 짓기가 뛰어나서 정철, 박인로와 함께 조선의 3대 시가인(三大詩歌人)으로 불린다.
그러나 역사학자 이덕일은 자연을 소재로 한 것 보다는 현실 정치에서의 우울함을 승화시킨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 출처 : [위키백과] 윤선도
위의 한시 또한 자연과 인간과의 화합이 주된 주제이자 내용이지만, '앞 여울 물소리 늘 소란하다 싫어하지 마시오 내게는 때마다 세상의 소음 안 듣게 해준다오'라는 구절에서 그동안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났던 많은 현실의 일들을 잠시나마 잊고, 작은 집에서 자연을 벗삼아 한가로이 지내는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규중원(閨中怨)
옥 같은 동산에 배꽃 피고 두견새 우는 밤
뜰 가득 달빛 더욱 서러워라
꿈에서나 만나려고 해도 도리어 잠마저 오지 않고
일어나 매화핀 창가에 기대어 오경의 닭소리 듣네
瓊苑梨花杜宇啼
경원리화두우제
滿庭蟾影更悽悽
만정섬영갱처처
相思欲夢還無寐
상사욕몽환무매
起倚梅窓聽五鷄
기의매창청오계
- 이매창(李梅窓), 《규중원》,전문
💬 이매창(李梅窓, 1573년~ 1610년)은 조선 선조 때의 부안 출신 기생이다. 본명은 향금(香今), 호는 매창(梅窓) 또는 계생(桂生·癸生), 계랑(桂娘·癸娘) 등으로도 불린다. 그녀의 문집인 《매창집》 뒤에 붙인 발문을 보면, 아버지는 부안현(오늘날 부안군)의 아전 이탕종(李湯從)임을 알 수 있다. 〈화원악보〉에 시조 1수가 전한다.
* 출처 : [위키백과], 이매창
위의 한시의 제목인 '규중원'은 '여인네의 원망' 또는 '한탄' 정도로 해석하시면 된다.
'조선의 3대 여성시인'을 말할 때 허난설헌, 황진이, 이매창을 꼽는데, 이 중 허난설헌은 사대부가의 여성이었고, 황진이와 이매창은 기생이다(신사임당의 첫째 딸인 이매창(李梅窓)과는 다른 인물이다. 즉 동명이인이다).
매창은 당대의 유명한 인물이었던 이귀, 허균 등과 교유하였으며, 시로써 명성이 자자하였다고 한다(공식적으로 이매창은 관청에 속한 기녀, 즉 관기이다).
특히 천민 출신 시인으로, 한시에 능통하다는 칭송을 받았던 유희경(劉希慶 1545~1636)과는 친분을 넘어 깊은 사랑을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서울 도봉구 도봉동에는 이 두 사람을 기리는 '유희경 이매창 시비(劉希慶李梅窓詩碑)'가 있다.
💬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이다. 본관은 강화(江華). 자는 응길(應吉), 호는 촌은(村隱). 천민 출신이나 한시를 잘 지어 당시의 사대부들과 교유했으며, 나라의 큰 장례나 사대부가의 장례를 예법에 맞게 치르도록 지도하는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도봉서원 창건에 기여했다. 박순, 남언경의 문인이다. 지금의 서울특별시출신이다.
* 출처 : [위키백과], 유희경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위는 교과서에 실려서 너무나도 유명한 매창의 《이화우 흩뿌릴 제》이다.
당시 천한 신분 출신이라는 공감대, 그리고 무엇보다 시로써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기쁨이 두 사람을 더욱 가깝게 만들었을까.
어쨌든 28살이라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두 사람은 서로 시를 주고 받으며 사랑을 키웠다.
유희경 이매창 시비에도 있지만,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더욱 애타는 마음을 읊은 유희경의 《매창을 생각하며》라는 시도 있다.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에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동에 비 뿌릴 젠 애가 끊겨라
娘家在浪州
낭가재낭주
我家住京口
아가주경구
相思不相見
상사불상견
腸斷梧桐雨
장단오동우
생전에 거문고를 잘 탔다고 하는 매창은 1610년에 3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는데, 이때 자신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고 전한다(그녀가 묻힌 오리현(五里峴)은 사람들이 매창이 묻혔다 하여 '매창뜸'이라고 부른다).
그 후 1668년에는 개암사(開巖寺)에서 그녀의 시 58편을 모아 『매창집(梅窓集)』을 펴내기도 했다.
💬 1983년, 이매창의 묘는 지방기념물 제65호의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그 묘역을 중심으로 매창공원이 만들어졌다. 2015년에는 이매창의 묘역을 중심으로, 넓이 7400평 규모의 매창 사랑의 테마 공원으로 확장되었다.
* 출처 : [나무위키], 이매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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