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에
말없이 바라
보아주시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합니다
때때로 옆에 와
서 주시는 것만으로도 나는
따뜻합니다
산에 들에 하이얀 무찔레꽃
울타리에 덩굴장미
어우러져 피어나는 유월에
그대 눈길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나는
황홀합니다
그대 생각 가슴속에
안개 되어 피어오름만으로도
나는 이렇게 가득합니다
- 나태주, 《유월에》, 전문
이제 유월에 접어드는 초여름이다. 오월도 그랬지만, 유월은 그보다 더 잰걸음으로 우리의 곁을 지나갈 것이고,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의 한가운데가 도래할 것이다.
사실 계절이라는 것은 해마다 반복되는 것이지만, 우리의 마음 상태에 따라 더 덥고, 더 추우며, 더 힘들 때가 있다. 나태주 시인의 시는 늘 그렇듯 긍정과 수용의 자세를 담아, 감사와 따뜻함으로 우리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축여준다.
길을 걷다 보면 붉은 덩굴장미가 정말 한창이던데, 마음이 탁하고 어지러우면, 막상 눈앞에 있는 아름다움조차도 즐기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가만히 꽃을 보고 있으면, 그 아름다움 속에 우리의 수많은 장면들이 꽃술처럼 박혀있는 것이 느껴지는데, 찡그리고, 화내고, 투덜거리느라 그 생각을 애써 떨쳐버린다. 이때가 아니면 마음의 꽃차례는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질 수도 있는데 말이다.
초여름
물냄새
비가 오려나 보다
나뭇잎 쏠리는
그림자
바람결
따라 흔들리고
애기똥풀에 코를 박은
모시나비
지상은
지금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 허형만, 《초여름》, 전문
💬 시인 허형만은 1945년 전라남도 순천 출생. 중앙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3년 '월간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 '첫차', '풀무치는 무기가 없다', '청명', '진달래 산천', '풀잎이 하나님에게', '모기장을 걷는다', '입 맞추기', '이 어둠 속에 쭈그려 앉아', '영혼의 눈', '비 잠시 그친 뒤', '그늘이라는 말', 시선집 '새벽', '따뜻한 그리움' 등과 평론집으로 '시와 역사 인식', '김영랑 연구' 등이 있다.
편운문학상, 한성기문학상, 월간문학 동리상, 광주 문화예술대상, 순천문학상, 제29회 공초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중국 옌타이대학교 교환교수, 목포 현대 시연구소 소장, 광주/전남현대문학연구소 이사장,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장, 계간 '서장과 상상' 편집 고문 등을 역임. 현재 목포대학교 국문과 명예 교수다.
* 출처 : [교보문고], 작가 소개, 허형만
나이 지긋한 어른들께서는 연일, 비가 좀 와야 되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더우면 어떡하냐, 하시며 하루를 보내신다. 게다가 오늘은 '가끔 비 소식이 있음'이라고 하는 예보도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아직 하늘은 조금이라도 비를 뿌릴 기색은 없어 보인다.
비는 너무 많이 와도 문제, 너무 안 와도 문제다. 이렇게 더위는 날마다 땅을 달구고, 우리의 체온을 달구고 있는데.
허형만 시인의 《초여름》은 딱 이맘때의 계절에 곧 비가 올 것 같은 찰나의 풍경을 잘 보여준다.
물냄새/비가 오려나 보다
잘 아시겠지만 비가 오기 직전에는 마른 흙에 물이 조금 섞인 것 같은 냄새가, 바람에 실려온다. 하늘에 먼저 드리워진 그림자는 나뭇잎에, 담장에, 이제 한바탕 쏟아질 거야, 하며 열기를 뿜어준다.
본문에 등장하는 모시나비는 호랑나비과의 곤충으로, 애기똥풀(또는 기린초, 고추나무, 나무 딸기, 미나리냉이 등) 등의 꿀을 매우 좋아한다고 하며, 특히 5월 이맘때에 가장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초여름의 전령사 중 하나라고 할까.
그래서 '애기똥풀에 코를 박은/ 모시나비'라는 시구가 있나 보다.
지상은/지금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시인의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으나, 약간의 비나마 기다리고 있는 - 정말 땅을 촉촉하게 적실 정도로만 - 입장에서 보자면 비를 기다리는 심정이 그리움으로 표현된 걸까. 아무튼 이른 더위는 또 하나의 그리움을 낳는다.
6월 편지
6월에는 편지를 적겠습니다
푸른 들판처럼 싱싱한
내 그리움을 몽땅 꺼내 놓고
초록 편지를 적겠습니다.
미소도 있을테고 안타까움도 있겠지만
마음 가는대로 적어지게 그냥 두어야겠습니다
편지를 다 적고나면 다시 읽지 않겠습니다.
적힌대로 보내겠습니다
편지를 적고 있는 지금
보고 싶어 눈물이 핑도는 이 순간도
편지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으니까요
6월에는 적힌 그대로 그대에게
보낼 초록 편지를 적겠습니다
답장 대신 그대 미소를 생각하며
바람 편에 그 편지를 보내겠습니다
- 윤보영, 《6월 편지》,전문
💬 윤보영 시인은 대전일보 신춘문예 동시(2009)가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커피도 가끔은 사랑이 된다』 등 시집 19권 발간하였고, 한국 열린 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시/글쓰기치료 강의)로 재직하였으며, 중학교 국어 교과서,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시와 동요 가사가 수록되었다.
윤보영 시인은 '커피 시인'이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는데, 그 별명답게 누구나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한 잔의 커피처럼, 쉽고 편안하게 읽히는 시를 쓰는 작가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얼마든지 난해하고 복잡하게 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누구나 고개를 주억거리며 단번에 읽어나갈 수 있는 서정시를 쓰는 시인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살면서 그리움과 애잔함, 그리고 그때 왜 그랬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없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삶이라는 것은 아마도 부치지 못한 편지가 쌓여가는 일이고, 때로는 그 편지를 혼자서 낭송하고, 찢어버리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문득, 아직도 박제된 장면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 사람과 그 상황에게 부칠 수 없는 편지를 쓰고 싶어 지고, '바람 편에' 그 편지를 가만히 띄워보고자 한다.
편지를 다 적고나면 다시 읽지 않겠습니다./
적힌대로 보내겠습니다/
답장 대신 그대 미소를 생각하며/
바람 편에 그 편지를 보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위의 시구가 이 시에서 가장 절창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대'는 반드시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지만, '그대'라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은 각자에게 가장 아름답고 쓸쓸하고 따뜻하고 고통스러운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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