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틀려도 괜찮아」
마키타 신지 글 / 하세가와 토모코 그림,
토토북, 2006년(1쇄)
1. 글쓴이 마키타 신지(蒔田 晋治)
✅ 아동 동화 작가인 마키타 신지는 1925년 시즈오카현에서 태어났습니다. 시즈오카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공립 초·중학교에서 근무하며 판화 교육, 작문 교육, 탁구 지도에 힘썼습니다.
현재 일본교육판화협회, 일본 작문회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판화로 보는 소년기』『생명을 조각한 소년』『친구를 돌아보면』『모래 폭풍』등이 있습니다.
* 출처 : [교보문고], 마키타 신지
2. 그린이 하세가와 토모코(はせがわともこ)
✅ 아동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는 하세가와 토모코는 1947년 홋카이도에서 태어나 무사시노 예술 대학 디자인과를 졸업했어요. 그린 책으로는 《틀려도 괜찮아》《있잖아요, 민들레 선생님》 《엄마, 아빠 잘 먹겠습니다》《괜찮아, 1학년이야!》 등이 있어요.
* 출처 : [영풍문고], 하세가와 토모코
3. 「틀려도 괜찮아」의 줄거리
✅ 구름 위의 신령님도 틀릴 때가 있다. 하물며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우리들이 틀리는 게 뭐가 이상한가. 이상하지 않은 것을 넘어, 그것은 당연하기까지 하다.
스스로 발표를 하던, 아니면 선생님이 나를 지목해서 대답을 하던, 우리는 틀릴까 봐 가슴이 쿵쾅쿵쾅 얼굴은 화끈화끈, 온몸에 힘이 쭉 빠지고 다리는 후들거리지만 처음부터 누구나 감탄하는 멋진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틀린 답을 말해도 정답을 찾아가다 보면 자라는 것이다. 틀려도 괜찮으니, 자신 있게 손을 들어라.
콩나물시루 같던 도시의 어느 초등학교 교실. 아이들은 코를 훌쩍거리며 연신 소매로 그것을 닦아내지만 별 소용이 없고(아이들의 소매는 닦아내는 코 때문에 늘 번들거렸다), 교실 안은 울고 웃고 재잘거리는 소음으로 가득했다.
한 때 100명이 넘기도 했던 그 교실에서 선생님들이 어떻게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기억할 것이며, 또 어떻게 그런 아이들에게 일일이 눈을 맞출 수가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아득하기만 하다. 이제는 아이들의 수가 점점 줄어서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사라지거나 통폐합이 되는 초등학교가 부지기수니 말이다.
우리들은 어려서부터 언제나 정답, 즉 정확한 답을 요구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왔고, 그것에 매우 익숙하다.
학교에서 중간고사 혹은 기말고사 같은 이런저런 시험을 쳐도, 성인의 문턱에서 수능을 쳐도, 그리고 입사를 위한 갖가지 시험에서도, 언제나 누군가가 원하는 정답을(몇 개의 그럴듯한 오답 중에서) 고르거나,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거나 자신은 그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 앞에서 또렷하게 대답하여야만 했다.
정답이라는 것은 사람의 학력이나 인성을 평가하는 대체재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고 보는데, 결국 우리는 평생을 '틀리면 안 된다'는 어떤 강박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체 '틀리면 안 된다'라고 맨 처음 생각한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사실 외향적인 성격이라 선생님의 질문에, 알던 모르던 손을 번쩍번쩍 잘 들고 무언가를 잘 말하던 아이였다. 하지만 십 년 남짓한 인생, 알면 뭘 그렇게 알았겠는가. 나의 대답은 대부분은 '오답'이었으며, 아주 드문 확률로 '정답에 근접한' 정도가 전부였다.
ㅇㅇ 야, 손은 그렇게
아무 때나 드는 게 아니야,
정답을 알아야지.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그렇게 말했고, 그런 나를 아이들은 '나댄다' '까불이'라며 종종 손가락질하고 비웃었다. 물론 처음에 나는 그런 반응들에 굴하지 않았지만, 선생님과 아이들의 그런 질타(?)가 계속되자 초등학교 중학년, 그리고 고학년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입을 닫고(?) 그 욕구를 속으로만 분출하기 시작했다.
뭐 나름 위축이라고 하면 위축이고, 현실에의 적응이나 타협이라고 한다면 또 그런 것일터.
지금도 강사와 글쓰기(둘 다 본캐다) 중, 직업상 나의 어느 한 쪽 면만을 보는 사람들은 매우 놀라워한다. 아니, 당신에게 이런 면이 있었어?
4. 틀리면 안 된다는 것,
어린이 집, 유치원 등의 학령전기 교육기관에서는 사실 아이들을 부모 대신 돌보아 주는 것에 더 주력하므로, 대체로 초등학교 등 이후의 학령기보다 사회성이나 여타 부분들, 특히 '실수'에 대해서 상당히 관대한 편이다.
하지만 초등학교로 넘어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나와는 생각이 다른 아이들이 포진하는 것은 기본이고, 선생님이 상대적으로 많은 아이를 상대해야 하므로, 학령전기 보다 조금 더 엄격한 규칙을 적용하지 않으면 교육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나처럼 틀린 답만 외치는 아이가 있으면 아무래도 분위기를 해치는 면도 있을 테고, 정작 '정답'을 알고 있는데도 나로 인해 그것을 말하지 못하는 아이가 있을 수도 있다면, 그것은 형평성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만약 교육의 현장을 단지 효율로만 판단한다면, 우리들의 어린 시절처럼 그냥 아이들을 쭉 앉혀놓고 지시봉을 든 선생님이 그냥 설명을 늘어놓고, '알겠어?' 라고 묻고 대충 '네' 하고 대답하면 끝이다.
'결과보다는 과정이다'는 말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수학문제가 있다고 가정할 때, 답만 달달 외워서는 소용이 없다. 어떤 과정(공식)을 거쳐서 결론에 다다랐는지가 더 중요하다. 따라서 풀이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정답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 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을 경험할 때 그 사건에서 벗어나기 보다 사건과 함께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육체는 지속적으로 성장할지 몰라도, 정신적 성장과 심리적 성장은 더 이상 이뤄지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멈추게 된다.
상처는 보통 어린 시절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 아이를 '내면 아이(inner child)'라고 부른다. 성인들은 보통 그 아이를 품고 살아가면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음에도 그 아이와 마주하길 꺼리고 부정하려 한다. 그 아이를 만나는 작업은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한 작업임에도 주저한다.
보통 부모의 영향을 크게 받지만, 성인의 무책임한 말 한마디가 아이를 고통스럽게 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아이가 부모 외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이는 선생님이다. 요즘엔 부모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갖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따라서 부모님을 떠나 만나게 되는 선생님이라는 존재는 특별하다. 그들을 통해 또 다른 사회를 경험하고 또 다른 대상관계를 형성해나가기 때문이다.
* 출처 : [그림책과 함께 하는 시공관 독서치료], 조난영,
관계성에 따른 그림책, p. 180
5. 창조적 아이
누구나 가슴 속에, 혹은 기억 속에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던 선생님이 한 명씩은 있을 것이다. 나를 믿어주었던 선생님, 혹은 내가 오답을 말했더라도 말을 끊거나 조바심 내지 않고 차분하게 그 과정을 지켜봐 주었던 선생님, '모든 아이는 비범하다'라고 믿고 그 가능성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주었던 선생님.
✅ 아이는 천재로 태어난다는 말이 있듯 선천적으로 건강하고 창조적인 힘을 갖고 있다. 융(Jung)은 이렇게 타고난 모습 그대로의 아이를 '놀라운 아이(wonder child)' 라고 불렀고, 그 아이는 잠재력과 경이로운 요소들을 지녔다고 했다.
이런 아이가 창조적 아이(Creative Child)가 된다. 어른의 기대에 적응하고자 타고난 본성을 잃어버리고 순응적인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놀라운 아이가 가진 창조성은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틀려도 괜찮아》의 선생님과 같은 어른이라면 놀라운 아이의 타고난 창조성이 묻히는 일 따위는 없을 것 같다.
* 출처 : [그림책과 함께 하는 시공관 독서치료], 조난영,
관계성에 따른 그림책, p. 180~181
만약 나에게 그런 선생님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제부터 내가 아이에게 그런 어른이 되면 된다. 아이들은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면서 성장한다. 우리 어른들도 때로는 길을 잃고 헤맨다. 거기에 단 하나의 정답만이 존재한다면 너무 슬프지 않은가.
당신이 만약 선생님이라면 무엇에 가치를 두며 아이와 함께할 생각인가?
언제나 맞는 답을
말해야한다고 생각하니까
틀리는 게 무섭고 두려워져.
손도 못 든 채
작게 움츠러들고
입은 꾹 다문 채
시간만 흘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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