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비
창문 밖을 내다보니
산 언덕 절벽 가을바람에
낙엽비 우수수 날리며
마지막 잎새는 흩어지며
절벽 밑으로 날리네 구르네 쌓이네
우수에 젖어드는 마음
허우적거리는 아픈 마음
조용히 가슴을 쓰려 안고
허무한 마음속에
낙엽비가 쌓이고
- 황인숙, 《낙엽비》,전문
💬 시인 황인숙은 1958년 12월 21일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면서 시단에 데뷔했다.
시집으로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1988), '슬픔이 나를 깨운다'(1990),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1994),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1998), '목소리의 무늬', '그 골목이 품고 있는 것들', '나 어렸을 적에', '나는 고독하다', '육체는 슬퍼라', '인숙 만필', '일일 일락', '이제 다시 그 마음들을' 등이 있다.
1999년에 동서문학상을, 2004년에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2018년에는 제63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 출처 : [교보문고], 작가 소개, 황인숙
창문을 열면, 야트막한 언덕이나 작은 산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저 맞은편 건물의 주차장 한편에 심어진 오래된 오동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며 그럭저럭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있다.
아직은 모든 날 바람이 차갑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도 없거니와 (낮에는 기온이 꽤 올라가므로) 어딘지 모르게 우수에 젖어드는 마음 한 자락에 가을은 가을이구나, 하고 혼잣말을 할 뿐이다.
어쨌든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의 비를 보려면 단풍이 한창이라고 하는 명승지를 일부러 찾아야 하는데, 일상에 정신없이 쫓기다 보면 그러기도 쉽지 않다. 안 그래도 짧은 가을은 그래서 더 짧다.
우수에 젖어드는 마음/
허우적거리는 아픈 마음/
이만큼 가을의 정서를 잘 대변해주는 시어가 또 있을까. 떨어지고 뒹구는 낙엽을 따라, 나의 마음도 그렇게 허우적거린다. 그리고 이제, 길고 긴 동면의 계절이 온다.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낙엽이 떨어질 때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낙엽이 왜 낮은 데로 떨어지는지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한 잎 낙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시월의 붉은 달이 지고
창 밖의 따스한 불빛이 그리운 날
한 잎 낙엽으로 떨어져 썩을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한 잎 낙엽으로 썩어
다시 봄을 기다리는 사람을 사랑하라
해마다 선암사 낙엽들은 해우소로 간다
- 정호승,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전문
지금 이 순간에 오롯이 집중하는 것도 좋지만, 무언가를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도 삶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물론 미루고 미뤄서, 하염없이 시간만 보낸다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가을처럼 묵직하고 온화하게, 무엇인가를 묵히고 기다리고, 그렇게 천천히 익어가고는 싶은데, 반대로 마음은 조급해지고, 그에 반해 행동은 느려진다.
신체의 변화는 그렇다고 쳐도, 오늘을 참고, 내일을 기약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이래저래 즐길 수 있는 것들은 도처에 널려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미 배가 꽉 차있는데도 불구하고, 골이 띵할 정도로 달콤한 디저트를 즐기고픈 유혹에 날마다 시달리듯이 말이다.
단풍으로 유명한 선암사는 아직 가보지도 못했고, 시 속에서 그 그윽한 정취를 맡고 혼자 취할 뿐이다. 떨어지는 낙엽은 서걱서걱, 사람들에게 밟혀서 땅의 자양분이 되고, 다시 공중에서 꽃을 피운다.
나도 누군가에게 낙엽처럼 자양분이 될 수 있을까. 언제나 요원한 일이다.
낙엽을 위한 파반느
세상이 잠시 황금빛으로 장엄하다
노란 은행잎들이
마지막 떠나가는 길 위에서
몸 버리는 저들 중에 어느 하나
생애에서 목마른 사랑을 이룬 자 있었을까
마침내 행복한 자가 그 누구였을까
최후까지 등불을 끄지 않는
기다림의 시간만이 저 혼자 깊어간다
몸은 땅에 떨어져 나뒹굴지라도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노라고
남은 불꽃을 당기는 저들만의
그리움이 안타깝게 쌓여가고 있다
- 이병금, 《낙엽을 위한 파반느》, 전문
💬 저자 이병금은 1998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하였고 경희대학교에서 『김지하 서정시의 생명사상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시집으로 『거울 등불을 켜다(2000, 시와 시학사)』,『저녁 흰새(2005, 문학수첩)』가 있다. 경희대학교 강사를 거쳐 시와 문화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출처 : [교보문고], 작가 소개, 이병금
이 시의 제목 중 '파반느(pavane, 파반)'는 이탈리아에서 16세기 초에 발생해 17세기 중반까지 유행했던 장중하고 위엄 있는 분위기의 궁정 무곡(출처 : [네이버 지식 백과], 두산백과)을 일컫는다.
물론 근대에 이르러 파반느(파반)는 다시 부활하여 현대에 이르고 있으며, 우리에게는 모리스 라벨(Maurice Joseph Ravel, 1875~1937) 작곡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 1899》이 유명하다.
이 시에서는 황금빛 가을의 장엄함, 거기에 속절없이 땅으로 떨어지는 낙엽의 모습에 빗대어 파반느를 제목으로 차용한 것이다. 이제 겨울이라는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을 준비하는 것은 낙엽이나 나무뿐만이 아닐 것이다.
가을과 낙엽과 그리움과 파반느, 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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