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아래에 있는 각각의 글들은
시에 대한 해석이나 해설이 아닌,
좋아하는 시에 대한 개인의 소소한 감상일 따름입니다.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11월 비
당신을 위해 내리는 거예요
이미 낙엽이 되어
땅 위를 구르고 있는데요
여전히 지난 화려했던 시절만 떠올리며
환상에 젖어있는
당신을 일깨우려고
소리 없이 줄줄 내리고 있는 거예요
곧 닥쳐올 겨울 채비 좀 하라고요
감싸 줄 포근한 옷도 좀 준비하고
맘 녹여줄 따끈한 물도 좀
데워 놓으라고요
- 오보영, 《11월 비》, 전문
다음 주면 벌써 입동(양력 11월 7일, 월요일)이다. 아직까지 낮에는 조금 덥고,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한, 한마디로 애매한 날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은 올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 다 그런 건지, 아니면 남들이 그렇다니까 나도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성인지는 몰라도, 해마다 11월이 되면 문득, 겨울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 또는 다짐 같은 것들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몸을 무겁게 옥죄지 않는 가벼운 외투, 창문에 꼼꼼하게 붙여야 할 뽁뽁이, 김장 등등, 본격적인 겨울이 오기 전 최소한 준비해야 할 목록들이다.
아아, 그전에 겨울바람만큼 차갑게 식어갈 마음도 데워놓아야겠지. 가을이 한창이지만, 내 마음은 홀로 겨울을 향해 걷고 있다. 마음에 내리는 비는 좀처럼 그칠 줄 모른다.
11월에 꿈꾸는 사랑
천 번을 접은 가슴 물소리 깊어도
바람소리 깃드는 밤이면
홀로 선 마음이 서글퍼라
청춘의 가을은 붉기만 하더니
중년의 가을은 낙엽 지는 소리
옛 가을 이젯 가을 다를 바 없고
사람 늙어감에 고금이 같거늘
나는 왜, 길도 없이
빈 들녘 바람처럼 서있는가
모든 것이 그러하듯
영원한 내 소유가 어디 있을까
저 나무를 보라
가만가만 유전을 전해주는
저 낙엽을 보라
그러나
어느 한순간도
어느 한 사람도
살아감에 무의미한 것은 없으리
다만 더 낮아져야 함을 알뿐이다.
- 이채, 《11월에 꿈꾸는 사랑》, 전문
단풍이 곱게 물들었다고, 지금 아니면 또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고, 누군가가 몇 장의 사진과 함께 짧은 안부를 전했지만, 거기에 스산한 바람이 깃들어 있다는 것까지는 감지하지 못했나보다.
괜시리 목덜미를 움츠리고 가볍게 몸을 떤다. 동체시력을 포함해서 동작도 느릿해지는 요즘이지만, 사실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릴만큼 감각은 예민하기만 하다.
이 시처럼 어쩌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바람 앞에 홀로 서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견디고, 버티고, 참아내면서 그 바람에 휩쓸리거나 날아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일.
앞만 바라보고, 뛰고, 넘어지고, 뒹굴었던 날들. 잠시 멈추어 서서 숨을 고르며, 내가 두 다리로 딛고 서있는 땅을 바라본다. 낙엽, 비, 눈물, 비통함, 많은 것들은 낮은 곳으로 향한다.
내딛는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걸어가야 한다.
11월의 나무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 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 시대 관공소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측광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등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 황지우, 《11월의 나무》, 전문
💬 황지우 시인은 1952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 서울대 인문대 미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고 '대답없는 날들을 위하여' 등을 '문학과 지성'에 발표하여 시단에 등장했다.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한국 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와 총장을 역임했다. 시집으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나는 너다', '게 눈 속의 연꽃',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등이 있다. 김수영 문학상,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출처 : [교보문고], 작가 소개, 황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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