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 대하여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 정호승, 《바닥에 대하여》, 전문
물 위를 걸으며
물 속에 빠져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물 위를 걸으면
물 속에 발이 빠지지 않는다
물 속에 빠져
한 마리 물고기의 시체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물 위를 걸으면
물 속에 무릎이 빠지지 않는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주어진
물 위를 걸어가는
이 짧은 시간 동안
물 속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지 말고
출렁출렁 부지런히 물 위를 걸어가라
눈을 항상 먼 수평선에 두고
두려워하지 말고
- 정호승, 《물 위를 걸으며》, 전문
💬 시인 정호승은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에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1973년에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별들은 따뜻하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시선집 '흔들리지 않는 갈대', '내가 사랑하는 사람' 등이 있으며, 어른을 위한 동화집 '연인', '항아리', '기차 이야기', 어른을 위한 동시집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산문집 '정호승의 위안'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출처 : [교보문고], 작가소개, 정호승
산다는 것은 정말, 이 시의 제목처럼 '물 위를 걷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또한 종종 감정이든 현실 상황이든 '바닥'을 경험한다).
어머니의 양수 속에서 마음껏 유영하던 시절을 지나 세상의 물 위에 섰지만,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심연 속으로 빠져버리거나, 제법 헤엄을 잘 친다고 자부하는 이도 종종, 힘들어 한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무엇인가를 향해 걸어가는 존재이고, 걸어가야만 하는 존재이다. 게다가 그 걷는 시간은 유한하고 한정적이다. 때로는 인생이라는 격랑에 빠지기도 하고, 온 몸이 물에 젖어 부들부들 떨거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물 속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지 말고/출렁출렁 부지런히 물 위를 걸어가라/
눈을 항상 먼 수평선에 두고/두려워하지 말고
정말로 그렇다. 빠지면 어떻게 하지? 빠져서 물에 젖으면 어떻게 하지? 와 같은 두려움은 아예 물 위를 걸어야만 하는 숙명조차 두렵게 만든다.
설령 잠시 빠졌거나 허우적거린 시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까지고 그 눈물의 강에 잠겨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고개를 들고 출렁출렁, 부지런히 물 위를 걸어가야겠다. 아니, 살아야겠다.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은 딛고 일어서라고 있는 것. 이쯤해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바닥은 내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정말로 강한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울면서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위로하는 날
가끔은 가끔은
내가 나를 위로할 필요가 있네
큰일 아닌데도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죽음을 맛볼 때
남에겐 채 드러내지 않은
나의 허물과 약점들이
나를 잠 못 들게 하고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부끄러움에
문 닫고 숨고 싶을 때
괜찮아 괜찮아
힘을 내라구
이제부터 잘하면 되잖아
조금은 계면쩍지만
내가 나를 위로하며
조용히
거울 앞에 설 때가 있네
내가 나에게 조금 더
따뜻하고 너그러워지는
동그란 마음
활짝 웃어주는 마음
남에게 주기 전에
내가 나에게 먼저 주는
위로의 선물이라네
- 이해인, 《나를 위로하는 날》, 전문
좀처럼 웃을 일이 생기지 않는다. 남들의 날 선 말들이 날카로운 가시와 창이 되어 나의 심장에 제멋대로 쿡쿡 박힌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너무 아프면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 쩔쩔매며 어떻게든 두 다리로 힘겹게 버텨본다. 아무도 나를 진정으로 위로해 줄 사람이 없다.
그 중 몇몇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쏜살같이 잊혀지는 어떤 말들을 한다. 그때 뿐이다.
금방 잊혀지는 말들 속에 나 또한 잊혀진다. 하지만 나마저 나를 잊으면 안 된다. 진정으로 나를 위로할 사람은 어쩌면 나 뿐일지도 모른다.
거울 앞에서 매일 미소를 짓는 연습을 했다는 어떤 사람처럼, 때로는 내가 남이 되어 나를 위로해줄 필요가 있다.
내가 웃으면 거울 속의 나도 웃는다. 내가 찡그리면 거울 속의 나도 찡그린다. 괜찮아, 괜찮아, 하고 나지막히 말하면 거울 속의 나도 똑같이 한다.
위로가 없는 삶이야말로 퍽퍽하고 재미없지 않은가. 물론 내가 나를 위로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매일 조금씩, 단 몇 초 만이라도 그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위로하는 시간을 가져보아야겠다.
「오늘도 정말 애썼어. 오늘도 네가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아. 난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
아닌 것
당신의 나이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이 입는 옷의 크기도
몸무게나
머리 색깔도 당신이 아니다
당신의 이름도
두 뺨의 보조개도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이 읽은 모든 책이고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이다
당신은 아침의 잠긴 목소리이고
당신이 미처 감추지 못한 미소이다
당신은 당신 웃음 속의 사랑스러움이고
당신이 흘린 모든 눈물이다
당신이 철저히 혼자라는 걸 알 때
당신이 목청껏 부르는 노래
당신이 여행한 장소들
당신이 안식처라고 부르는 곳이 당신이다
당신은 당신이 믿는 것들이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당신 방에 걸린 사진들이고
당신이 꿈꾸는 미래이다
당신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당신이 잊은 것 같다
당신 아닌 그 모든 것들로
자신을 정의하기로 결정하는 순간에는
You are not your age,
Nor the size of clothes you wear,
You are not a weight,
Or the colour of your hair,
You are not your name,
Or the dimples in your cheeks,
You are all the books you read,
And all the words you speak,
You are your croaky morning voice,
And the smiles you try to hide,
You're the sweetness in your laughter,
And every tear you've cried,
You're the songs you sing so loudly,
When you know you're all alone,
You're the places that you've been to,
And the one that you call home,
You're the things that you believe in,
And the people that you love,
You're the photos in your bedroom,
And the future you dream of,
You're made of so much beauty,
But it seems that you forgot,
When you decided that you were defined,
By all the things you're not
- 에린 핸슨(Erin Hanson), 《아닌 것, Not》, 전문(류시화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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