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일이 하도 섭해서
세상 일이 하도 섭해서
그리고 억울해서
세상의 반대쪽으로 돌아앉고 싶은 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어버리기라도 하고 싶은 날
내게 있었소
아무한테서도 잊혀지고 싶은 날
그리하여 소리 내어 울고 싶은 날
참 내게는 많이 있었소.
- 나태주, 《세상 일이 하도 섭해서》, 전문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숨어버리기라도 하고 싶은 날
아무한테서도/잊혀지고 싶은 날
나 같은 경우는 심하면 하루에 몇 번이나 이렇다. '나약하다'라고 속단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개인적으로 사람을 많이 상대해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더욱 그런지 어떤지는 몰라도, 그냥 '섭한' 날들이 있다.
보이는 대로만 쉽게 판단하려고 하는 사람들, 윽박지르고 다그치고 무언가 가르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사람들, 정작 자기의 말투도 거의 시비 조면서 다른 사람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고 난리를 치는 사람들...
우리는 사람들 속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상호작용을 해야만 하는 사회적 존재이므로, 어떤 형태로든 부딪히지 않으면 안 되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날도 점점 더워지는데 지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지긋지긋한 곳을 박차고 떠나버리고 싶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먹고 사는 문제는 언제나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법.
젠장, 눈물을 삼키는 것은 언제나 나 자신의 몫일 뿐. 마음껏 울 수도 없는 게 현실이다.
오늘의 결심
라일락이나 은행나무보다 높은 곳에 살지 않겠다
초저녁 별빛 보다 많은 등을 켜지 않겠다
여행용 트렁크는 나의 서재
지구 끝까지 들고 가겠다
썩은 치아 같은 실망
오후에는 꼭 치과에 가겠다
밤하늘에 노랗게 불 켜진 보름달을
신호등으로 알고 급히 횡단보도를 건넜으되
다치지 않았다
생각하면 티끌 같은 월요일에
생각할수록 티끌 같은 금요일까지
창틀 먼지에 다치거나
내 어금니에 혀 물린 날 더 많았으되
함부로 상처받지 않겠다
목차들 재미없어도
크게 서운해하지 않겠다
너무 재미있어도 고단하다
잦은 서운함도 고단하다
한계를 알지만
제 발목보다 가는 담벼락 위를 걷는
갈색의 고양이처럼
비관 없는 애정의 습관도 길러보겠다
- 김경미, 《오늘의 결심》, 전문
💬 김경미 시인은 1959년 경기 부천 출생이다. 한양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 석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비망록'이 당선되었으며, 2005년 노작문학상을 수상했다. 2007년 한국방송작가협회 라디오작가상을 수상하였고, 2008년 8월~11월 아이오와 국제창작레지던스에 참가하였다.
2009년부터 원주 한라대학교 미디어콘텐츠학과에 출강했으며, KBS-1FM '출발 FM과 함께' 담당 작가로 일하고 있다. 2010년에는 서정시학작품상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쉬잇, 나의 세컨드는', '행복한 심리학' 등이 있고, 사진에세이로 '바다, 내게로 오다', '막내'가 있다
* 출처 : [교보문고], 작가 소개, 김경미
여행용 트렁크는 나의 서재/지구 끝까지 들고 가겠다
하루를 살아내면서 마음 속에 여행용 트렁크 하나 챙기지 않은 사람, 누가 있을까.
마음 속 여행지에는 전화도 오고 메일도 오고 독촉도 온다.
그러면 우리는 또 번개같이 현실로 날아와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행지에 두고온 것들을 생각한다.
사는 것은 언제나 재미만 있지도 않고, 또 언제나 서운함만 있는 것도 아니지만, 재미는 티끌만큼 작게 느껴지고, 서운함은 왠만한 건물만큼 덩치가 크다.
함부로 상처받지 않겠다/목차들 재미없어도/크게 서운해하지 않겠다
시인은 시 속에서 결심하지만, 개인적으로 이것은 반어적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하루를 통과하며 수없이 상처받고, 재미없는 목차들에 좌절하며, 몇번이고 크게 서운해한다.
역설적이게도, 상처 받고, 재미없고, 서운함의 연속인 것이 우리들의 삶이 아닐까.
그렇게 한계는 한계로써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또 한번 서운해진다.
밖에 더 많다
내 안에도 많지만
바깥에도 많다.
현금보다 카드가 더 많은 지갑도 나다.
삼 년 전 포스터가 들어 있는 가죽가방도 나다.
이사할 때 테이프로 봉해둔 책상 맨 아래 서랍
패스트푸드가 썩고 있는 냉장고 속도 다 나다.
바깥에 내가 더 많다.
내가 먹는 것은 벌써부터 나였다.
내가 믿어온 것도 나였고
내가 결코 믿을 수 없다고 했던 것도 나였다.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안데스 소금호수
바이칼 마른풀로 된 섬
샹그릴라를 에돌아가는 차마고도도 나다.
그때 힘이 없어
용서를 빌지 못한 그 사람도 아직 나다.
그때 용기가 없어
고백하지 못한 그 사람도 여전히 나다.
돌에 새기지 못해 잊어버린
그 많은 은혜도 다 나다.
아직도
내가 낯설어하는 내가 더 있다.
- 이문재, 《밖에 더 많다》, 전문
💬 이문재 시인은 1959년 경기도 김포(현 인천시 서구)에서 나고 자랐다. 경희대 국문과에 재학중이던 1982년 『시운동』 4집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제국호텔』 『마음의 오지』 『산책시편』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가 있고 산문집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내가 만난 시와 시인』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지훈문학상, 노작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강의하고 있다.
* 출처 : [교보문고], 작가 소개, 이문재
내 안에도 많지만/바깥에도 많다.
나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또한 타인이 나를 규정하는 잣대는 무엇인가?
이 시의 초입처럼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 일테면 내가 살고 있는 집의 평수나 자동차의 연식이나 배기량, 현금 카드나 신용 카드의 한도액이 나를 규정하는 것인가(개인별 신용도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이 다르니, 이것도 시인의 말처럼 외부, 또는 바깥에 존재하는 나라고 할 수 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노래도 있지만, 이처럼 바깥에도 나는 있다.
먼지처럼 나에게 찰싹 붙어, 평생을 따라다닐 수 있는 또 다른 나.
나라는 사람을 어떤 지갑이라고 가정할 때, 거기에서 하나 둘씩 꺼내다보면, 의외로 많은 것들이 딸려나오게 마련이다.
삼 년 전 포스터가 들어 있는 가죽가방도 나다./이사할 때 테이프로 봉해둔 책상 맨 아래 서랍/패스트푸드가 썩고 있는 냉장고 속도 다 나다.
혼자 자취 생활을 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패스트푸드(또는 다른 음식)가 썩고 있는 냉장고 속'이라는 구절이 공감이 갈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실제의 경험, 또 하나는 시커멓게 썩어가는 마음.
어쨌든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바라보는 나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때로는 나도 모르는 나를 타인이 더 잘 파악하고 있기도 하다. 이를 수용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일 뿐.
나조차도 낯선 내가 있다는 것, 문득 타인의 행동이나 모습을 통해 나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 '그러지 마' 보다 '그럴 수 있다'라는 시선이 그리워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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