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코스모스는
왜 들길에서만 피는 것일까
아스팔트가
인간으로 가는 길이라면
들길은 하늘로 가는 길,
코스모스 들길에서는 문득
죽은 누이를 만날 것만 같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9월은 그렇게
삶과 죽음이 지나치는 달
문득 고개를 들면
벌써 엷어지기 시작하는 햇살
태양은 황도에서 이미 기울었는데
코스모스는 왜
꽃이 지는 계절에 피는 것일까
사랑이 기다림에 앞서듯
기다림은 성숙에 앞서는 것
코스모스 피어나듯 9월은
그렇게
하늘이 열리는 달이다
- 오세영, 《9월》, 전문
💬 작가 오세영은 전남 영광 출생, 전남 장성, 전북 전주에서 성장.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졸업, 동대학 문학박사.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미국 버클리대 및 체코 챨스대 방문교수. 아이오아대학교 국제 창작프로그램 참여. 1965-6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시간의 뗏목', '봄은 전쟁처럼', '문열어라 하늘아', '무명연시', '사랑의 저쪽', '바람의 그림자' 등. 학술서로 '20세기 한국시 연구', '상상력과 논리', '우상의 눈물', '한국현대시 분석적 읽기', '문학과 그 이해' 등.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만해상 문학부문 대상, 시협상, 김삿갓문학상, 공초문학상, 녹원문학상, 편운문학상, 불교문학상 등 수상.
* 출처 : [교보문고], 작가 소개, 오세영
아직은 코스모스가 한창, 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렵지만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 종종 마음을 뺏긴다.
한층 더 높아지고 탁 트인 자연의 스크린. 봐도봐도 질리지 않는다.
하늘을 올려볼 수 있고, 드문드문 피어있는 코스모스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인가.
무섭게 비를 쏟아내던 지난 여름과 열기는 아직도 물러갈 생각이 없는 듯 하지만, 그 위세는 분명 한 풀 꺾였다.
아스팔트가/
인간으로 가는 길이라면/
들길은 하늘로 가는 길,/
개인적으로 정말 아름다운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재촉하듯 깔린 아스팔트, 그리고 하늘로 가는 길, '들길'. 들길은 이제 일부러 도시를 벗어나지 않으면 만나기도 어렵다.
이제 여름은 들판에서 잠들고, 잠든 여름의 숨결은 서늘한 바람이 되어 들판과 아스팔트 한 켠에 피어있는 코스모스를 흔든다.
꽃들이 서서히 낙하할 때, 코스모스는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은 그렇게, 코스모스와 함께 활짝 열린다.
9월에 꿈꾸는 사랑
날개는 지쳐도
하늘을 보면 다시 날고 싶습니다
생각을 품으면 깨달음을 얻고
마음을 다지면 용기가 생기겠지요
단 한 번 주어지는 인생이라는 길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만
끝까지 걷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세상에 심어놓은 한 송이, 한 송이의 꿈
어느 들녘에서, 지금쯤
어떤 빛깔로 익어가고 있을까요
가슴은 온통 하늘빛으로 고운데
낮아지는 만큼 깊어지는 9월
한층 겸허한 모습으로
내 아름다운 삶이여! 훗날
알알이 탐스런 기쁨의 열매로 오십시오
- 이채, 《9월에 꿈꾸는 사랑》, 전문
더위에 지치고, 세상사에 지치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냥 미간을 찌푸린채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화가 치밀어 오르는 장면들로 인해, 우리는 살짝만 건드려도 봇물 터지듯 쏟아질지 모르는 감정의 응어리와 함께 한다.
초가을의 하늘은 그저 높아지기만 하는 것이 아닌, 그 품도 넉넉해져서, 조금 더 우리들의 머리와 가슴으로 가깝게 내려온다.
웃기가 힘들면 바쁜 걸음을 잠시 멈추고, 9월의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자.
고이 접혀있던 마음 속의 날개가 꿈틀거린다. 파아란 하늘 빛이 광선처럼 내 몸을 뒤덮는다.
이왕에 시작한 걸음, 끝까지 걸어야지, 하고 다짐해본다.
다시 9월이
기다리라, 오래오래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지루하지만 더욱
이제 치유의 계절이 찾아온다
상처 받은 짐승들도
제 혀로 상처를 핥아
아픔을 잊게 되리라
가을 과일들은
봉지 안에서 살이 오르고
눈이 밝고 다리 굵은 아이들은
멀리까지 갔다가 서둘러 돌아오리라
구름 높이, 높이 떴다
하늘 한 가슴에 새하얀
궁전이 솟았다
이제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게 되는 시간
기다리라, 더욱
오래오래 그리고 많이.
- 나태주, 《다시 9월이》, 전문
기다렸던 아니던, 계절의 가고 옴은 반드시 있다.
싫다고 안 할 수 없고, 좋다고 무조건 할 수만도 없는, 우리의 일상은 어차피 지루하게 반복되는 것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그 반복 속에서 다시 9월이 왔다.
하늘은 높아만 지고, 바람은 은근하게 불어와 머리칼을 흔드는 요즘, 시인은 가을을 치유의 계절이라고 선언했다.
넘치고 넘치는 아픔을 바람에 실어 날려보낼 수만 있다면, 사람이든 장면이든 종종 앞뒤가 안맞는 기억이든 그것을 그리움으로 대체할 수도 있을텐데.
어쩌면 이러한 마음의 작용 자체가 정화와 치유의 첫 걸음인지도 모르겠다. 무엇이든 지루할 정도로 반복하고, 기다릴 줄 알아야 그 무겁고 무거운 응어리를 씻어낼 수도 있으리라.
9월의 시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의 여름만큼 무거워지는 법이다
스스로 지나온 그 여름만큼
그만큼 인간은 무거워지는 법이다
또한 그만큼 가벼워지는 법이다
그리하여 그 가벼운만큼 가벼이
가볍게 가을로 떠나는 법이다
기억을 주는 사람아
기억을 주는 사람아
여름으로 긴 생명을
이어주는 사람아
바람결처럼 물결처럼
여름을 감도는 사람아
세상사 떠나는 거
비치파라솔은 접히고 가을이 온다
- 조병화, 《9월의 시》, 전문
💬 저자 조병화의 아호는 편운片雲. 1921년 경기 안성에서 태어나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물리화학과를 수료하였다.1949년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으로 등단하였다.
경희대학교 문리대학장, 인하대학교 문과대학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한국시인협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아시아자유문학상ㆍ한국시인협회상ㆍ서울시문화상ㆍ3ㆍ1문화상ㆍ예술원상ㆍ대한민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국민훈장 동백장ㆍ국민훈장 모란장ㆍ금관문화훈장 등을 수훈하였다.
시집으로 『버리고 싶은 유산』 『하루만의 위안』 『먼지와 바람 사이』 『밤의 이야기』 『어머니』 유고시집 『넘을 수 없는 세월』 등 53권의 시집과 시선집 『꿈』 『숨어서 우는 노래』 등, 수필집 『왜 사는가』 『남은 세월의 이삭』 외 다수가 있다.
* 출처 : [교보문고], 작가 소개, 조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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