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아래 쓰여 있는
각각의 글들은
시에 관한 전문적인 분석이나 해석,
그리고 해설이 아닌
개인의 소소한 감상입니다.
읽는 사람에 따라 그 내용과 감상은
서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엄마가 말했어요
아가야 이리온
엄마가 손을 내밀면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조금만 더 한 발만 더
그러면 나뭇가지에 새잎이 나고
땅바닥에 새싹이 돋고
아가야 한 발만 더 가까이
가까이 오지 않을래 그러면
나뭇가지에 땅바닥에 꽃이 핀다고요
꽃이 아기였고 아기가
또 봄이였어요
아니에요 엄마가 봄이었어요
- 나태주, 《엄마가 말했어요》, 전문
방긋방긋 웃으며 엄마에게 안기려는 아기처럼 예쁜 존재가 또 있을까.
포동포동한 볼을 하고, 세상의 모든 것들이 궁금한 아가의 눈과 마주치는 것이 기분 나쁜 사람이 있을까.
엄마와 아기가 눈 맞춤을 하고, 아기가 그 오밀조밀한 손발을 꼼지락거리며 오물오물, 무엇인가 옹알이를 하는 모습은 언제나 절로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실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나는, 언제까지고 물러가지 않을 봄날에 감싸인 채 엄마와 아기를 바라본다.
나 또한 아기였을 때, 나의 엄마에게 저렇게 봄꽃처럼, 봄바람처럼 한없이 예쁘고 애틋한 존재였겠지.
엄마, 하고 나도 아기처럼 엄마를 올려다본다.
오냐, 엄마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문득, 아기와 엄마가 함께 있는 그 풍경 속에 한없는 꽃비가 떨어진다. 아기와 엄마가 있는 곳은 언제나 봄.
언제나, 언제나, 언제까지나 엄마와 아기가 행복하기를.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꽃밭이 내 집이었지.
내가 강아지처럼 가앙가앙 돌아다니기 시작했을 때
마당이 내 집이었지.
내가 송아지처럼 겅중겅중 뛰어 다녔을 때
푸른 들판이 내 집이었지.
내가 잠자리처럼 은빛 날개를 가졌을 때
파란 하늘이 내 집이었지.
내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내 집은 많았지.
나를 키워준 집은 아주 많았지.
- 이준관,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전문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기형도, 《엄마 걱정》, 전문
💬 1979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후, 교내 문학동아리 '연세문학회'에 입회하여 본격적으로 문학수업을 시작하였다. 1980년 대학문학상 박영준 문학상에 <영하의 바람>으로 가작에 입선된 바 있다.
그 후 1982년 대학문학상 윤동주문학상(시부문)에 <식목제>로 당선되었으며,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안개>가 당선되어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1981년 안양의 문학동인 '수리'에 참여하여 활동하면서, 동인지에 <사강리>등을 발표하며 시작에 몰두하였다. 1989년 3월 7일 새벽 뇌졸증으로 사망했다.
저서로는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 <짧은 여행의 기록>, 추모문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전집 <기형도 전집> 등이 있다.
* 출처 : [교보문고], 작가 소개, 기형도
어린 시절, 엄마는 아이의 세계에서 어쩌면 거의 모든 것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양육자가 된다는 것은 짧고도 긴 우리의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온 힘을 다해 갈아넣는 생명 같은 것.
엄마의 안전한 그늘 아래, 아이는 놀고, 웃고, 울고, 또 자랐다.
엄마의 그 든든하고 따뜻한 품과 넓게 느껴졌던 등이 언젠가부터 왜소해지고, 어느 순간 나의 어린 시절과 비슷해진 지금에 이르렀어도, 여전히 엄마에게 기대어 어리광을 피우고 싶다.
어린 나는 온 신경을 집중한 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 엄마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잠이 들었고, 늙은 엄마는 도시로 나간 나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더 늙었다.
그립지 않으면 기다릴 필요도 없다. 나는 아직도 엄마를 기다리게 하고 있고, 엄마는 나의 마음 속에서 여전히 괜찮다, 바쁜데 어떡하니, 하면서 또 나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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