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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정원, Art

✔최초의 한국영화, 의리적 구투(의리적 구토, 김도산 감독, 연쇄극, 키노 드라마, 단성사, 한국영화 100년, 신파극, 영화역사관)

by 이야기가 있는 정원 2021.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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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상영영화는 뤼미에르의 「열차의 도착(Arrival Of A Train At La Ciotat, L'Arrivee D'Un Train A La Ciotat)」(1896년), 초최초의 SF 영화는 조르주 멜리에스의 「달 세계 여행, Le Voyage Dans La Lune, A Trip To The Moon」(1902년, 두 작품 모두 프랑스) 이다. 

 

 

 

✔최초의 상영영화, 열차의 도착(1896년 최초의 영화, 뤼미에르 형제, 눈싸움, 시네마토그래프, 키

1. 최초의 상영영화 잘 아시고들 계시겠지만, 인류의 역사상 '최초의 상영영화'는 뤼미에르 형제가 제작한 <열차의 도착, 1896>이다. 1896년이라니! 지금으로부터 무려 125년 전이다. 그러니까 1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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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SF영화, 달 세계 여행(조르주 멜리에스, 쥘 베른, 지구에서 달까지, 특수효과, 다중노출,

1. 최초의 상영영화, 그 후 세계 최초의 '상영영화'로 알려져 있는 뤼미에르의 「열차의 도착(Arrival Of A Train At La Ciotat, L'Arrivee D'Un Train A La Ciotat), 1896」이 그야말로 당시 사람들에게 커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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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최초의 '한국영화'는 제목이 무엇이며,

누가 만들었을까?

 

 

1. 김도산, 한국 최초의 영화 감독이 되다

 

"단성사주 박승필씨는 이번에 오륙천 원의 많은 돈을 들여서 우리 조선에 처음되는 활동사진 연쇄극을 영사한다 함은 이미 보도된 바이거니와 대판 천활사의 사진 촬영기사가 4일 입경하여 신당동 부근에서 5, 6 양일 동안은 내지인의 연쇄극을 쵤영하고 작 7일부터 김도산 일행의 연쇄극을 영사한다는데, 처음 박을 것은 <의리적 구투>라는 각본을 박을 것이라 한다.영사하는 장소는 명월관 지점, 청량리 홍릉 부근, 장충단, 한강철교 등이라더라."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 최초 영화감독 - 충무로에서 태어난 숙명적인 영화인, 김도산 (한국 최초 101장면, 1998. 9. 10., 김은신)

 

위의 기사는 1919년 10월 8일, 당시 <매일신보>에 실렸던 기사이다. '단성사', '활동사진', '신당동', '명월관', '청량리', '장충단', '한강공원' 등 우리에게 익숙한 장소나 지명 등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에 김도산(金陶山)이라는 인물의 이름도 보인다. 

 

그가 바로 1919년 10월 27일 개봉한, 최초의 한국영화인 「의리적 구투(義理的 仇鬪)」를 만든 '한국 최초의 영화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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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최초의 영화감독, 김도산 사진출처 위키백과

 

김도산(1891~1921)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연극인. 영화인으로 본명은 김진학(金鎭學)이라고 한다.

 

태생은 무려 서울 충무로. 영화와 인연이 될 숙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 하지만 그에 대한 정보는 안타깝게도 그리 자세하지 못하다. 

 

상동학교(尙洞學校)를 졸업한 그는 신극 운동을 하던 소설가(혈의 누, 1906년을 집필함)이자 언론인, 이인직(李人稙, 1862~1916)에게 연극을 배운 뒤 이인직의 사설극장인 원각사에서 배우활동을 하였는데, 주로 악역에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 협률사(協律社), 또는 원각사(圓覺社)는 1902년 대한제국 고종 때 서울 정동의 야주현(夜珠峴)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현대식 국립극장이자 개화기의 대표적인 서양식 극장이다. 국악예술인들을 중심으로 한 흥행 단체이며 공연 내용은 창극·재담(才談)·줄타기·화초사거리 등이었으며 지방으로 순회공연을 하였다.

1908년 이완용의 신임을 받는 이인직이 주관하는 사설극장이 되면서 이름이 원각사로 바뀌게 된다. 원각사는 <춘향가>, <심청가>, <화용도> 등의 고전과 창극을 주로 공연하다가 이인직의 신소설 <은세계>를 처음 극화하여 상연하였다. 다만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914년에는 화재로 소실되었다.

* 출처 : [위키백과], 협률사 

 

 

또한 김도산은 1919년 극단 신극좌를 창단하고 단성사(團成社)를 중심으로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연쇄극(連鎖劇) 「의리적 구토(義理的仇討)」, 「의적(義賊)」 등을 공연하였는데,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단성사는 종로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상설 영화관이다.

 

멀티플렉스 상연관들에게 밀려 쇠퇴의 위기를 맞았고 2012년 마침내 문을 닫았으나, 현재는 '영화역사관'으로 탈바꿈해 있다. 또한 1993년 당시 「서편제」가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당시 194일이라는 개봉관 최장 상영기록을 세운 바가 있다(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도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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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 : 1919년 10월 28일 <매일신보>에 실린 「의리적 구투」 개봉기사. 사진출처 위키백과

* 우측 : <아리랑>의 각본. 감독 겸 주연 춘사 나운규.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후에 영화인협회의 주최로
김도산의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가
단성사에서 상영된 날
(1919년 10월 27일)을 기념하여
'영화의 날'이 제정되었다.

* 출처 : [위키백과], 김도산

 

 

2. 키노드라마, 그리고 영화 의리적 구투(구토)의 줄거리

 

영화 「의리적 구투」를 일컬어 '연쇄극', 즉 서양에서 말하는 '키노드라마(kino-drama)'라고 하는데, 키노드라마는 무엇일까? 

 

■ 키노드라마(kino-drama) :
본래 무대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야외장면이나 활극장면을 영화로 찍어 연극 중 무대 위 스크린에 삽입한 것을 뜻하는 용어로, '
영화적 연극' 또는 '연쇄극'이라고도 한다.

즉, 
영화가 발명되면서 고전적 예술 장르인 연극이 장면 전환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영상을 이용하는 것을 뜻하는 용어였으나, 현재는 '영화적 연극'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키노드라마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다시 말해 기본적인 컨셉트를 연극으로 상연하고, 무대에서 기술적으로 표현하기 부분만 '활동사진'으로 따로 찍은 다음, 그것을 필요에 따라 무대 위의 스크린을 통해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영화와 연극을 합쳐놓은 형태, 연극 속에서 짧은 영화가 상영되는 형태라고 보면 된다. 

 

즉, 지금의 '극 영화'와는 조금 차이가 있으므로 의리적 구투는 엄밀하게 말하면 '한국 최초의 키노드라마' 또는 '연쇄극'이라고 일컬어야 할 것이다. 

 

김도산은 자신의 영화를 만들기 전, 일본에서 내한한 극단의 연쇄극을 본 적이 있었고, 그것에서 착안하여 자신의 영화에도 시도한 것이었는데, 영화의 관람료를 당시 연극 입장료(40전)보다 훨씬 비싼 1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연일 '만원사례'를 기록할 정도로 흥행에 성공하였다(정확하지는 않지만 당시 단성사 1등석 입장료인 1원은 현재의 5만원 정도이다).

 

잘아시다시피 당시의 연극. 영화는 대부분 유명한 「홍도야 우지마라(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처럼 현 시대의 풍속과 인심 등을 주제로 한, 관객의 눈물샘과 분노를 자극하는 신파극(新派劇)이었다.

 

「의리적 구투」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연쇄극으로 만들어지기 이전(1919년 7월)에 이미 우미관(優美館)에서 연극으로 절찬리에 공연된 바가 있다.

 

 

■ 의리적 구투의 줄거리 :
간악한 계모(여장남우, 金泳德 扮) 밑에서 오로지 가문의 체통을 위하여 갖은 수모를 참아오던 마쓰야마(松山, 金陶山 扮)가 마침내 계모 일파의 흉계가 아버지의 재산을 가로채고 가문을 더럽힐 지경에 이르자 결의형제인 다케야마(竹山, 李敬煥 扮)와 우메쿠사(梅草, 尹爀 扮)와 더불어 응보의 칼을 뽑는다는 권선징악적인 내용이다.

* 출처 : [위키백과], 의리적 구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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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의리적 구투의 의의, 그리고 유산들

일제 강점기라는 당시의 시대상, 그리고 일본의 신문물이 물밀듯이 들어오던 시기, 최초의 영화적 연극인 「의리적 구투」는 각본이나 제작방식(공동각본 및 촬영. 편집에 '미야카와 소우노스케'라는 일본인이 참여함)에 있어서 완전한 한국인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의 자본(제작 박승필, 당시 단성사 극장주)과 인력이 '주축'이 되어 구체적인 제작결과를 내었다는 점, 김도산 감독(당시 28세)의 연쇄극이 대성공을 거둔 이후로, 후배 영화인들이 차례로 연쇄극에 도전하였다는 점에 의의를 둘 수 있겠다. 

 

비록 한국 최초의 영화감독인 김도산은 '최초의 극영화(우리가 흔히 아는 영화)'인 「국경」을 촬영하는 도중 안타깝게도 31세의 짧은 인생을 마쳤고(늑막염으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되어 있다), 현재 의리적 구투의 필름이나 대본 등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는 등의 비운도 있었지만,

 

한국영화 100년(1919 - 2019)을 맞이한 2019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 영화제 최고의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룩함으로써, 의리적 구투 이후 한국 영화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또한 한국영화 100주년을 기념하여, 의리적 구투를 연극으로 다시 리메이크한 작품이 지난 2019년 공연되기도 했다. 

 

 

 

 

 

* 의리적 구투 리메이크(2019)의 트레일러. 출처 유튜브 : https://youtu.be/FnQ1ASJ6c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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