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에 꿈꾸는 사랑
하찮은 풀 한 포기에도
뿌리가 있고
이름 모를 들꽃에도
꽃대와 술이 있지요
아무리 작은 존재라 해도
갖출 것을 다 갖춰야 비로소
생명인 걸요
뜨거운 태양 아래
바람에 흔들리며 흔들리며
소박하게 겸허하게 살아가는
저 여린 풀과 들꽃을 보노라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견딜 것을 다 견뎌야 비로소
삶인 걸요
대의만이 명분인가요
장엄해야 위대한가요
힘만 세다고 이길 수 있나요
저마다의 하늘을 열고
저마다의 의미를 갖는
그 어떤 삶도 나름의 철학이
있는 걸요
어울려 세상을 이루는 그대들이여!
저 풀처럼 들꽃처럼
그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 무엇 하나 넉넉하지 않아도
이 하루 살아있음이 행복하고
더불어 자연의 한 조각임이
축복입니다
- 이채, 《7월에 꿈꾸는 사랑》,전문
시는 시인의 가슴에서 태어나지만, 그 몫은 온전히 그 시를 읽는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는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고, 눈물 샘을 터뜨리며, 왜 학창 시절에 시험지 한가운데서 지문으로 인용되는 것이 어색한지를, 시간이 흘러서야 가만히 일려준다.
문득 펼쳐든 옛 시집에서, 도시의 한복판을 걷다가 문득 올려다본 한 구절의 인용구 속에서 살처럼 날아와 내 가슴에 꽂히는 것이 시다. 늘 하는 말이지만, 시는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쓰는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한다.
삶은 견디는 것이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어떤 일들을 견디는 것이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견디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내일을 견디기 위해 오늘을 견디는 것이다.
유명인의 삶만 아름답고 훌륭한가. 뭐든지 넘쳐나야만 행복한 것인가.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지극히 평범해 보여도, 우리는 싯구처럼 '저마다의 하늘을 열고/ 저마다의 의미를 갖는 삶'을 살고 있고, 자연스레 삶의 철학을 가꾸어 가고 있다.
아름답다, 훌륭하다. 그것은 오롯이 오늘을 견디는 당신의 영예다.
칠월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놓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은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 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 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 허연, 《칠월》, 전문
💬 저자 허연은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 산문집 『그 남자의 비블리오필리』, 『고전 탐닉』이 있다. 시작작품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 출처 : [교보문고], 작가 소개, 허연
담백하지만 쓸쓸한, 달콤하지만 코끝이 자꾸 시큰거리는 이 시를 읽으며 나는, 진작에 던져버린 시쓰기와 비오는 날이면 늘 극장으로 향했던,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버린 잊은 그대', 즉 나를 떠올렸다.
양말을 집에 벗어놓고, 낡은 슬리퍼와 살이 나간 우산을 쓴 채 향했던 동시상영관. 비만 오면 역류했던 하수구 때문에 어기적 어기적 걷다가 몇 번이나 엉덩방아를 찧어 온 몸이 젖어버린 나.
사람들은 흘끔거리고, 네온사인은 깜빡거리고, 디지털로 넘어가기 전의 필름은 덜거덕거리기 일쑤였다(그리고 동시상영관의 필름은 전개상 중요한 장면에서 과감하게 가위질이 되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도 좋았다. 때로는 필름 속 세계와 나의 세계가 바꿔치기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재개봉관과 동시상영관은 잰걸음으로 사라졌다. 며칠 전,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집 근처 멀티플렉스 극장의 입구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눈으로는 지금 극장에 걸리고 있는 최신 영화의 예고편을 쫒았지만, 나의 의식은 내가 들고 있는, 새것 냄새가 풀풀 나는 팜플렛이 무색하게, 내가 대본을 쓰고, 심지어 출연까지 하며 무대에 올렸던, 오래 전 몇 편의 연극을 떠올리며 썩은 미소를 짓기도 했다.
나는 여기에 없었고, 거기에 있었다. 아팠던 기억은 이런 저런 체념과 함께, 한 여름 아이스크림처럼 순식간에 녹아버렸다. 아직도 종종 비오는 거리를 비척거리며 걷는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여름
그곳에 영화관이 있었다
여름엔 수영을 했고 나무 밑을 걷다 네가 그 앞에 서있기에 그곳에 들어갔다 거기선 상한 우유 냄새와 따뜻한 밀가루 냄새가 났다 너는 그 장면들에 대해 얘기했고 그 장면들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어두워지면 너는 물처럼 투명해졌다 여름엔 수영을 했다 물 밑에 빛이 가득했다
강 밑에 은하수가 있었다
- 강지이, 《여름》, 전문
💬 강지이(姜智伊) 시인은 1993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2017년 중앙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수평으로 함께 잠겨보려고(2021)》는 그의 첫 시집이다.
* 출처 : [교보문고], 작가 소개, 강지이
여름 샐러드를 먹으면서흰 눈이 쌓인 운동장을 함께 달리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고, 또 있었더라도
우린 앞으로 잘 달릴 수 있다.
그런 믿음은 이상하게도 잘
사라지지 않는다.
- 작가의 말
그 옛날 재개봉관과 동시상영관 안에서는 뭐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그러니까 시큼하고 눅눅하고 비릿함 위에(바닥에 흘린 탄산 음료의 냄새도 한몫 단단히 했다), 극장마다 조금씩 달랐던 튀긴 팝콘과 지금은 편의점 한 구석에서 만날 수 있는 포장된 양념 오징어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극장에서의 오래된 기억은 스크린 속 어떤 영화의 장면은 배경이 되고, 그 극장이 품고 있던 사람들의 체취와 공기가 얽혀있는 것이 전경일 것이다. 기억하는 것만으로, 그곳에 떠돌던 냄새가 다시 코끝을 스치다니.
'그래도 좋았다'. 내가 참 좋아하고 자주 사용하는 단어를 시인은 시 속에 박아넣었다. 그래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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