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빛
겨울 숲,
갈기갈기 달아나는 하늘 봐라.
불도 바람도 남김 없는 꿈속에 다시
봄빛, 사박사박
앙상한 웅얼거림이 모여 숲이 되는 꿈.
- 신동옥, 《봄빛》, 전문
💬 신동옥 시인은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다. 2001년 <시와 반시>로 등단했다. 시집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 「고래가 되는 꿈」을 썼다.
문학일기 「서정적 게으름」, 시론집 「기억해 봐, 마지막으로 시인이었던 것이 언제였는지」를 펴냈다.
* 출처 : [교보문고] 작가 소개, 신동옥
우리는 봄을 1년의 시작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이는 틀린 말은 아니다. 앙상하던 가지에 새순이 돋고 꽃이 피고, 얼음은 녹아 물은 불어나며, 바람은 제법 따뜻해지니까(그리고 농부들은 한 해의 농사를 위해 파종을 한다).
하지만 봄은 '갑자기' 오는 것처럼 느껴지기는 할 망정, 겨울의 품에서 꽁꽁 얼어있다가 눈밟는 소리가 지나가야 비로소 온다.
즉, 밤이 있기에 아침이 있고, 겨울이 있기에 봄이 있다.
춥고 긴 겨울이 어느새 지나고, 벌써 '덥다'는 소리를 연발하게 되는 봄의 한가운데에 우리는 서있다.
겨울 숲/ 갈기갈기 달아나는 하늘 봐라
그래서 시인은 '봄빛'이라고 제목을 붙여놓고, '겨울 숲'부터 시작했나 보다. 사박사박, 눈 밟는 소리와 함께 봄빛은 온다.
앙상한 웅얼거림이 모여 숲이 되는 꿈
앙상한 가지, 온통 무채색으로 덮여있던 산이며 들에, 색색의 꽃들이 튀어나온다. 아아 저곳이 산이구나, 비로소 봄이 왔구나, 비로소 숲이 되었구나,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봄
저 요리사의 솜씨 좀 보게
누가 저걸 냉동 재룐 줄 알겠나
푸릇푸릇한 저 싹도
울긋불긋한 저 꽃도
꽝꽝 언 냉장고에서 꺼낸 것이라네
아른아른 김조차 나지 않는가?
- 반칠환, 《봄》 전문
💬 반칠환 시인은 1964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청남초등학교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2002년 서라벌문학상, 2004년 자랑스러운 청남인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는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웃음의 힘』, 『전쟁광 보호구역』이 있고, 시선집으로 『누나야』가 있다. 장편동화 『하늘궁전의 비밀』, 『지킴이는 뭘 지키지』, 시 해설집 『내게 가장 가까운 신, 당신』, 『꽃술 지렛대』, 『뉘도 모를 한때』, 인터뷰집 『책, 세상을 훔치다』 등이 있다.
반칠환 시인의 『새해 첫 기적』은 인터넷 시선집이며, 『새해 첫 기적』은 교보생명 ‘광화문글판’에 선정되었던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가 있다. 2000년대 가장 시집이 많이 팔린 시인 중의 한 사람이 반칠환 시인이며, 그의 첫 시집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은 3만부 이상이 팔렸고, 그의 두 번째 시집인 『웃음의 힘』은 2만부 이상이 팔렸다.
그는 풍자와 해학을 통해 현대문명을 비판하면서도 어린 아이와도 같은 동화적 상상력으로 인간성의 회복과 함께,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건강하고 풍요로운 공동체 사회를 시적 이상으로 꿈꾼다.
* 출처 : [교보문고], 저자소개, 반칠환
제목은 '봄'인데 첫 연에 느닷없이 '요리사의 솜씨' 가 나온다.
봄과 요리사가 무슨 관계일까, 혹시 이것도 낯설게 하기? 같은 생각들을 하며 눈으로 스크롤을 한다.
겨울을 '꽝꽝 언 냉장고'라고 표현한 것과, 봄이면 볼 수 있는 아지랑이를 냉장고에서 막 꺼낸 재료들이 바깥 공기와 만나 '아른아른 김'이 나는 것으로 표현한 것에 웃음이 나면서도, 시인의 재치와 상상력에 감탄하게 된다.
맞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꽝꽝 언 냉장고에서 꺼내지는 재료들이 해동되는 과정이 바로 봄일 터.
몇 줄 안 되는 짧은 시 속에 풍지와 해학이 넘치는, 재기발랄한 가운데 인생의 명장면 하나를 나는 보았다.
사실 한국에서 시집이 2만 부~ 3만 부가 팔린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이것은 넓은 독자층을 가져야만 가능하며, 독자의 가슴을 단박에 뒤흔드는, 비교적 쉬운 시어들로 이루어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의 또 다른 시 《웃음의 힘》도 감상해 보자.
웃음의 힘
넝쿨 장미가 담을 넘고 있다
현행범이다
활짝 웃는다
아무도 잡을 생각 않고 따라 웃는다
왜 꽃의 월담은 죄가 아닌가?
- 반칠환, 《웃음의 힘》, 전문
아직 장미가 만개할 계절은 아니지만, 곧 넝쿨 장미가 월담하는 광경을 누구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월담하는 장미 넝쿨을 '현행범'이라고 표현했는데, 바로 그 뒤에 누구도 그 현행범을 잡을 생각도 하지 않고 활짝 웃는다고 노래했다.
사람이 남의 집 담장을 타고 넘으려 하면 죄가 되지만, 꽃 넝쿨이 그러하면 모두들 기뻐한다.
이것이 삶의 아이러니고 해학이다. 어떤 사람이 남의 집 담장을 타고 넘으려고 하다가 당신과 눈이 마주쳤다고 하자. 그런데 그 사람이 씨익 하고 웃었다고 해서, 당신도 같이 웃겠는가?
즉, '담을 넘는 대상의 차이와 그 대상을 본 타자의 행동(웃음)'이 이 시의 포인트다(그래서 제목이 '웃음의 힘'이다).
시인은 우리에게 묻는다.
왜 꽃의 월담은 죄가 아닌가?
벚꽃 그늘
벚꽃이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었네. 어둡고 추운 세상이 멀리까지 환해졌네. 사람들이 북새통인 것처럼 쓰레기통엔 쓰레기가 넘치네. 벚꽃이 만개한 이 기쁜 봄날, 허접한 생은 노구를 끌고 쓰레기통만 뒤지네. 깔깔거리고 웃는 웃음소리가 무더기로 흩어지는 벚꽃 같네. 벚꽃 그늘 아래로 배고픈 고양이가 옹야옹야하고 지나가네.
- 권달웅, 《벚꽃 그늘》, 전문
💬 시인 권달웅은 1975년 <심상>으로 등단하였다. 시집에 『해바라기 환상』, 『사슴뿔』,『바람 부는 날』, 『지상의 한사람』,『내 마음의 중심에 네가 있다』,『크낙새를 찾습니다』,『반딧불이 날다』,『달빛 아래 잠들다』,『염소 똥은 고요하다』, 『공손한 귀』,『광야의 별 이육사』 이 있고,
시선집 『초록세상』, 『감처럼』,『흔들바위의 명상』이 있다. 편운문학상, 펜문학상, 최계락문학상, 신석초문학상을 수상하였다.
* 출처 : [교보문고], 저자소개, 권달웅
권달웅 시인의 시 《벚꽃 그늘》은 '일정한 운율을 갖지 아니하고 자유로운 형식으로 내재율(內在律)의 조화만 맞게 쓰는 산문 형식의 서정시(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인 '산문시(prose poem)'에 속한다.
따라서 언뜻 보면 시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문단과 문장 자체에 운율이 있으므로 여러 번 읽어 보는 것이 좋다.
제목을 왜 《벚꽃 그늘》이라고 했는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화려함 이면에 소외되어 있는 존재들, 누구는 오로지 즐기지만 또 누구는 그렇지 못하다.
아래의 글은 시인이 직접 쓴 자신의 시론 중 일부이다.
나는 대상이 지니고 있는
존재의 본질에 시점을 두고,
대상과 내면의 관계를 유추하는 서정시를 쓰고 있다.
거대한 문명의 틈서리에서
소리 없이 사라져가는 것들,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
약하고 하찮은 것들,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불러들여
생명을 부여하고 있다.
나의 시는 삶의 근원적인 물음에서 출발하여,
그에 대한 답을
아주 작고 약한 것들에서 찾는다.
작고 약한 것들이 우주의 소중한 구성체이기 때문이다.
나의 시안(詩眼)은
언제나 살아 움직이는
생명들의 원형질에 두고 있다."
- 권달웅, 《대상과 내면의 유추》중에서, 시집 《꿈꾸는 물》, 도훈, p.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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