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
불이 물 속에서도 타오를 수 있다는 것은
연꽃을 보면 안다
물로 타오르는 붉은 차가운 불
불은 순간으로 살지만
물은 영원을 산다
사랑의 길이 어두워
누군가 육신을 태워 붉 밝히려는 자 있거든
한 송이 연꽃을 보여주어라
달아 오르는 육신과 육신이 저지르는 불이 아니라
싸늘한 눈빛과 눈빛이 밝히는 불
연꽃은 왜 항상 잔잔한 파문만을 수면에 그려놓는지를
- 오세영, 《연꽃》, 전문
💬 시인 오세영은 전남 영광 출생, 전남 장성, 전북 전주에서 성장.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졸업, 동대학 문학박사.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미국 버클리대 및 체코 챨스대 방문교수. 아이오아대학교 국제 창작프로그램 참여.
1965-6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시간의 뗏목', '봄은 전쟁처럼', '문열어라 하늘아', '무명연시', '사랑의 저쪽', '바람의 그림자' 등. 학술서로 '20세기 한국시 연구', '상상력과 논리', '우상의 눈물', '한국현대시 분석적 읽기', '문학과 그 이해' 등.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만해상 문학부문 대상, 시협상, 김삿갓문학상, 공초문학상, 녹원문학상, 편운문학상, 불교문학상 등 수상.
올해는 연꽃 구경을 가지 못했는데, 아마도 이제 그나마 연꽃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철이거나, 폭우에 다 떨어져서 보기 어려울 것이다.
옛 이집트의 나일 강가에서 피던 수련은 신성함의 상징이었고, 불교에서는 부처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 바로 연꽃이며, 불교의 극락세계에서는 모든 신자가 연꽃 위에 신으로 태어난다고 믿었다고 한다.
불상이나 불화 등에서 부처나 보살 등이 연꽃 위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는 인도 전통 신앙에서 연꽃이 신의 탄생('연꽃의 여신상(BC 3000년경)' : 바라문교의 경전에는 이 여신이 연꽃 위에 서서 연꽃을 쓰고 태어났다고 함)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참조 : [두산백과], 연꽃).
여러 종류의 연꽃이 있지만,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주로 백색이거나 연한 분홍이다.
시인의 눈에는 마치 연꽃이 물속에서 타오르는 불, 또는 촛불처럼 보였나보다
(사찰 등에 가면, 연꽃 모양의 초(또는 연등 - 물론 이 경우 연등의 '연' 은 '불탈 연(燃)'으로, 연꽃의 '연(蓮)'과는 다르게 그냥' 불을 붙인다'라는 의미이다 - 가 많다).
굳이 말하자면 초와 연꽃은 공통점이 있다.
초는 자신의 몸을 태워서(불교식으로 말하자면 공양해서) 주변을 밝히고(그리고 일말의 온기도 준다), 연꽃은 진흙탕 속에 자신의 뿌리를 내리고 고귀한 꽃을 피워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연꽃은 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잎은 연잎 밥으로, 뿌리는 연근(조림, 튀김 등)으로, 열매는 한약재로 사용한다.
정신적으로는 깨달음을 상징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정말 '버릴 게 없는' 유용한 식물이 바로 연꽃이다.
우리의 현실은 고단하지만, 결국 고단함 속에서 깨달음도 나온다는 것을 연꽃은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연꽃 구경
연꽃이 피면
달도 별도 새도 연꽃 구경을 왔다가
그만 자기들도 연꽃이 되어
활짝 피어나는데
유독 연꽃 구경 온 사람들만이
연꽃이 되지 못하고
비빔밥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받아야 할 돈 생각을 한다
연꽃처럼 살아보자고
아무리 사는 게 더럽더라도
연꽃 같은 마음으로 살아보자고
죽고 사는 게 연꽃 같은 것이라고
해마다 벼르고 별러
부지런히 연꽃 구경을 온 사람들인데도
끝내 연꽃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연꽃들이 사람 구경을 한다
해가 질 때 쯤이면
연꽃들이 오히려
사람이 되어보기도 한다
가장 더러운 사람이 되어보기도 한다
- 정호승, 《연꽃 구경》, 전문
우리들의 현실은 저 연꽃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진흙탕과 별만 다르지 않다.
온갖 욕심과 집착과 다툼과 생각과 고뇌와 번민이 부딪히고 얽혀, 저 청초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연을 보면서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다.
'아 예쁘다', 하고 감탄하면서도 우리는 밥알을 씹고, 담배를 피우며, 받아야 할 돈과 주어야 할 돈 등을 생각한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또 그것이 우리들의 현실이다. 인간은 그런 존재이다.
짧은 여행을 마치면, 우리는 벌여놓은 일들이 그득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연꽃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진흙탕이 우리가 매일매일 숨을 쉬며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맞닥뜨리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상징한다면, 그 속에서 피워내는 꽃은 우리들이 온 힘을 다하여 역경을 이겨내는 모습 - 우리들의 삶이 실은 연꽃의 삶이 아닐까 -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붉은 연꽃
살아온 길이 아무리 험한들
어찌 알 수 있을까
꼭 다문 입술만으로는
짐작할 수 없는 네 발자국
만나는 사람마다
환한 미소 보일 수 있다면
이 또한 훌륭한 보시라고
진흙 뻘에 발 묻고도
붉은 꽃등으로 켜지는 너
- 목필균, 《붉은 연꽃》,전문
연꽃이었다
그 사람은,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이다
내가 사는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람 하나 있다
눈빛 맑아,
호수처럼 푸르고 고요해서
그 속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침 나절 연잎 위,
이슬방울 굵게 맺혔다가
물 위로 굴러 떨어지듯, 나는
때때로 자맥질 하거나
수시로 부서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내 삶의 궤도는, 억겁을 돌아
물결처럼 출렁거린다
수없이, 수도 없이
그저 그런, 내가
그 깊고도 깊은 물 속을
얼만큼 더 바라볼 수 있을런지
그 생각만으로도 아리다
그 하나만으로도 아프다
- 신석정, 《연꽃이었다》,전문
✅ 억겁(億劫) :
무한히 긴 시간을 나타내는 말.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시공 불교사전
💬 시인 신석정은 1907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중앙불교전문강원 박한영 스님의 문하에서 불전연구를 하였다. 1924년 조선일보에 시 ‘기우는 해’를 발표하였고 1931년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등과 『시문학』동인활동을 하며 시 ‘선물’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으로 「촛불」(1939) 「슬픈 목가」(1947) 「빙하」(1956) 「산의 서곡」(1967) 「대바람 소리」(1970)가 있고, 시선집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1990), 유고시집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2007) 등이 있다.
전주고, 전주상업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전북대 등에서 강의를 하였다. 한국문학상, 문화포장, 대한민국예술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 출처 : [교보문고], 작가 소개, 신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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